[기고] 철종 이원범은 어떤 임금일까

                                                                      ▲ 이경수
                                                                                     - 강화읍 출생, 거주
                                                                                     - 전)양곡고등학교 역사 교사


농사꾼 출신 임금님?
철종의 아버지 이광은 강화에서 위리안치 상태였습니다. 집 밖으로 나올 수 없는 감금 생활이었던 것이죠. 반면에 이원범은 비교적 자유롭게 나다닐 수 있는 유배 생활을 했습니다. 강화 사람들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들으면서 백성들 삶을 알게 됩니다.
즉위하면서 이시원을 개성유수로 삼습니다. 강화에 있을 때 주민들로부터 이시원이 훌륭한 사람이라는 말을 여러 번 듣고 기억했던 것입니다. 이시원은 철종 조정에서 요직을 맡으며 활동하게 됩니다.
유배 시절 원범은 나무꾼이 아니었을 겁니다. 물론 농사꾼도 아니고요. 그런 거 하지 않아도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없었습니다. 오랜 세월 갇혀 지내던 아버지 이광도 굶어 죽지 않았습니다. 먹을거리와 땔감을 공급받았으니까요.
이원범 가족은 생활비로 매달 50냥을 받았습니다. 상평통보를 보통 엽전이라고 하죠. 엽전 한 개가 1푼이고, 엽전 열 개는 1전, 엽전 100개가 1냥입니다. 1냥이 적은 돈이 아닙니다. “한 푼만 줍쇼.”는 용납되지만, “한 냥만 줍쇼.” 했다가는 매 맞을 수 있는 겁니다.
50냥이면 당시 시세로, 적게 잡아도, 쌀 10가마 이상을 살 수 있는 금액이었습니다. 결코, 적은 돈이 아닙니다. 원범 일행이 살아가는데 부족하지 않았을 겁니다. 더구나 관비(官婢)가 드나들며 물을 긷고 땔감도 가져다주었습니다. 원범이 농사짓고 나무해다가 팔아야만 먹고 살 수 있던 게, 사실은 아니었습니다.
50냥은 누가 준 걸까요? 내수사(內需司)입니다. 내수사는 왕실의 재산을 관리하던 관청이에요. 사실상 임금 헌종이 원범네에게 달마다 50냥씩 지급해 준 셈입니다.
내수사가 당연히 한양에 있습니다만, 일종의 지사가 전국 곳곳에 있었습니다. 강화에도 있었습니다. 강화에 산재한 내수사 소속 농토를 운영하고 관리했습니다.
원범이 농사꾼으로 살았다는 얘기가 어떻게 해서 생겨난 건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막연하게 짐작해본다면, 원범이 가끔 내수사 소속 논에 나가서 둘러보고 모도 내보고 추수도 해보고 그랬던 것이 아닐까, 그게 전해지면서 농사꾼으로 와전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철종이 글을 몰랐다는 이야기도 꽤 퍼졌습니다. 한양에 살 때, 아버지 이광이 일부러 글을 가르치지 않았다고 말해집니다. 공부 많이 하면 그게 외려 신변에 위협이 될 수 있다고 여긴, 일종의 처세술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광은 이원범을 가르쳤습니다.
원범은 강화로 귀양 오기 전에 이미 이런저런 책을 읽고 기초적인 학문 능력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물론 임금으로서 정사를 제대로 펼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었지요. 하지만, 즉위하고 수년간, 정말 독하게 공부합니다. 그래서 일정한 수준에 도달하게 됩니다.

원범이 즉위하게 된 이유
영조가 아들 사도세자를 죽입니다. 그래서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가 즉위합니다.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그 아들 순조가 임금이 됐습니다. 순조 아들이 효명세자입니다. 그런데 젊은 나이에 죽고 맙니다. 왕위는 순조의 손자, 즉 효명세자의 아들인 헌종이 이어받습니다. 헌종이 승하했습니다. 계승할 아들이 없습니다. 그래서 원범이 즉위하게 됩니다. 영조-사도세자-은언군(이인)-이광-이원범, 이렇게 이어지는 왕계입니다.
철종을 소개하는 글을 시사 잡지에서 읽었습니다. 일부를 여기에 옮깁니다.
“헌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당시 대왕대비인 순원왕후와 외척이 어수룩한 이원범을 순원왕후의 양자로 들여 왕위에 올리지요. 훌륭한 왕 후보들을 물리치고 말입니다. 조선 역사상 가장 쇼킹한 사건입니다.”
“그런데 왜 어리석고 준비되지 않은 이원범을 굳이 왕으로 삼았을까요. 순원왕후 뒤에는 순조-헌종 2대에 걸쳐 왕비를 낸 세도가 안동 김씨 가문이 있었습니다. 순원왕후는 순조의 비이자 안동 김씨 출신으로, 가문의 권세를 유지하고자 영특하고 능력 있는 후보를 배제한 채 쉽게 조종할 수 있는 이원범을 왕으로 삼은 것이지요.”〈주간동아〉(2017.03.17.)
통설을 잘 정리해서 소개했습니다. 철종이 왕위를 잇게 된 이유를 대개 이렇게 설명들 합니다. 하지만, 적잖이 오류가 있습니다.
헌종이 세상을 떠났을 때 ‘훌륭한 왕 후보들’이 있던 게 아닙니다. 안동김씨 권세를 유지하려고 ‘영특하고 능력 있는 후보를 배제한 채 쉽게 조종할 수 있는 이원범을 왕으로 삼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영조의 혈통을 직접 이은 계승 후보자 자체가 별로 없었습니다.
그나마 원범 집안에 3명이 있었어요. 원범의 큰형 이원경은 이미 사망했으나 작은형 이경응이 살아 있었고 또 사촌 형 이희도 있었습니다. 이경응, 이희, 이원범 중에서 순원왕후가 이원범을 선택했습니다.
이원범이 제일 어수룩하고 무식해서 허수아비 왕으로 적당했기 때문이라고요?
아닙니다. 원범이 선택된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나이일 겁니다. 당시 이원범은 19세, 이경응은 22세, 이희는 26세였습니다. 나이가 뭐가 중요하냐고요?
순원왕후는 수렴청정을 결정했습니다. 개인 욕심 또는 안동김문의 욕심 때문만이 아닙니다. 당시 상황에서는 누가 대왕대비였어도 수렴청정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궁궐 생활을 전혀 해보지 않은 이가 왕이 될 겁니다. 궁궐 언어가 백성들이 쓰는 일상어와 꽤 다릅니다. 그런 것부터 익혀야 합니다. 즉위하고 혼란이 올 수밖에 없습니다. 새 임금이 궁궐 생활에, 왕의 자리에 적응할 때까지 일정 기간 그 역할을 대신할 필요가 있습니다.
수렴청정(垂簾聽政)은 임금이 어린 나이에 즉위했을 때 왕실 어른이 왕 역할을 대행하는 것입니다. 원범 나이 열아홉이 적은 나이가 아니지만, 어쨌든 수렴청정이 가능한 나이이기는 했습니다. 반면 스물이 훌쩍 넘은 이경응이나 이희는 관례상, 수렴청정이 무리입니다.
분명한 것은, 대왕대비 순원왕후가 원범을 다음 왕으로 지목할 때까지도 원범의 학문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몰랐다는 것입니다. 즉위하고 나서야 학문이 변변치 않음을 알았습니다. 순원왕후가 내심 좋아했을까요?
순원왕후가 가까운 친척에게 보낸 내밀한 편지에 자기 속을 털어놓았습니다. 《순원왕후의 한글편지》에서 옮깁니다.

만고풍상을 겪어 거의 촌동(村童)이나 다름없는 상감인지라 학문이 없다, 죄지은 집안의 자손으로 귀양 가 살다 보니 그리된 걸 어쩌랴, 임금이 학문이 있어야 나라를 잘 다스리는 법인데 그렇지가 못하니 내 속만 끓이다가 탈진하였다.


원범이 학문을 갖추지 못한걸, 옳다구나, 좋아한 게 아닙니다. 학문 없는 게 너무도 걱정스러워서 속 끓이다가 탈진까지 했다는 대왕대비입니다. 그렇습니다. 원범이 무식해서 선택된 게 아닙니다.
“제일 만만하게 시키면 시키는 대로 잘할 애를 하나 고르자. 이래가지고 고른 게 강화도령이야.”

철종에 대한 철저한 무시와 냉소가 밴 말입니다. 끼리끼리 모여 앉아 이런 말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유명한 TV 교양 프로그램에서 이름만 대면 모두가 알 저명한 출연자가 이 말을 했습니다. “시키는 대로 잘할 애를 하나 고르자” 비아냥했습니다. 강화읍내 어느 식당에서 촬영한 것입니다. 아쉽습니다. 출연자는 방송의 영향력을 고려해야 했습니다. 비록 일반적인 철종 인식이라고 해도 너무 경박했다고 생각합니다.

철종은 허수아비 왕이었나
철종이 임금으로서 무능했다는 평가에 일정 부분 동의합니다. 《철종실록》을 읽어봐도 업적이라고 할만한 게 찾아지지 않습니다. 안동김문에 맞설, 자기 사람을 키우려고 무던히도 애썼습니다만, 왕권을 바로 세우지도 못했습니다.
그래도 저는 철종을 꽤 괜찮은 군주라고 평하고 싶습니다. 백성을 아끼고, 걱정하고, 사랑하는 마음만큼은 정말 진심이었습니다. 어느 군주에게도 뒤지지 않을 겁니다.
백성 삶의 고단함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려고 노심초사했습니다. 가을비가 많이 내리면, 다 익은 벼가 쓰러지지나 않을까 걱정했습니다. 임금 중에 벼가 쓰러지는 게 뭔 말인지 모르는 이도 있었을 것입니다.
“삼정(전정·군정·환곡)은 국가의 대정(大政)인데, 지금 삼정이 모두 병들어서 민생이 고달프고 초췌해졌다. 그중에서도 적정(환곡)은 가장 백성의 뼈에 사무치는 폐단이 되었다.…심지어 나누어 주지도 않은 곡식을 납부하라고 독촉하니, 슬프다.”
철종이 한 말입니다. 타락한 조세제도의 문제점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강화 유배 생활 동안 백성 삶을 직접 살펴서 현실을 파악하고 있던 것입니다.
“방백과 수령 가운데 탐오함이 가장 극심한 자는 침실의 벽에다 써놓았다는 것을 이미 하교한 바 있다.” 그렇습니다. 백성들 쥐어짜는 못돼먹은 지방관 명단을 방에 써 붙이고 지낸 철종입니다. 하지만, 눈에 띄는 개선은 이루지 못했습니다.

“민생이 곤궁해도 구제할 수 없고 법령이 막혀도 쇄신할 수 없고 재물과 곡식이 다 없어져도 절약하지 못하고 탐묵(貪墨, 탐욕스러운 짓)이 횡행해도 징계하여 다스리지 못하니, 첫째도 과매(寡昧, 덕이 부족하고 우매함)한 나의 죄요, 둘째도 과매한 나의 죄이다.”


자책했습니다.
그런데, 임금의 마음이 중요한가? 중요합니다. 입으로는 “국민을 위해서”라고 말하면서 마음은 자신의 이익에만 가 있는 정치인들을 우리는 많이 봐왔습니다. 진심으로, 진정으로 자기가 아니라 나라의 미래를 고민하고 민생을 걱정하여 대책을 강구하는 정치인이 지금 얼마나 될까요.
철종은 안동김씨 세력의 꼭두각시도, 허수아비도 아니었습니다. 한계는 있었지만, 그들과 협력과 견제를 병행하며 개혁을 꿈꾸고, 개선을 추진했습니다. 맞서야 할 때는 맞섰습니다.
즉위 초, 안동김문의 경쟁자였던 풍양조씨 조병현을 처벌하라는 조정의 요구가 강력했습니다. 임금 된 지 불과 한 달밖에 안 된 철종, 수렴청정 중인 대왕대비에게 알아서 하시라고 미룰 줄 알았더니 아니었습니다. 단박에 거부했습니다.
대사헌이 나서고 대사간이 나서고, 다시 사헌부와 사간원 양사가 합계하여 또 요구하고, 대신들까지 한목소리로 조병헌을 처벌하시오! 외쳤으나 철종은 듣지 않았습니다. 철종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물러가라!” 19살, 완전 생초보 임금, 강화도령 이원범이 말입니다.


마무리합니다.
조선 제25대 임금 철종(哲宗, 1831~1863, 재위:1849~1863)은 훌륭한 군주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안동김문이 시키는 대로 그저, “예예” 따른 허수아비도 아니었습니다. 정치를 죄다 안동김문에 맡기고, 백성 삶에 무관심한 채 술이나 퍼마시고, 여인이나 품던 한심한 군주도 아니었습니다.
백성의 배고픔을 덜어주려고 꽤나 애썼던 임금입니다. 뜻대로 이루지 못해, 백성에게 늘 미안해했던 임금입니다. 철종에 대한 뿌리 깊은 그리고 광범위한 오해가 조금이라도 풀렸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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