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거란에서 사신을 파견하여 낙타 50필을 보냈다. 왕은 거란이 일찍이 발해와 계속 화목하다가 갑자기 의심을 일으켜 맹약을 어기고 멸망시켰으니, 이는 매우 무도(無道)하여 친선 관계를 맺을 이웃으로 삼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였다. 드디어 교류를 끊고 사신 30인을 섬으로 유배 보냈으며, 낙타는 만부교 아래에 매어두니 모두 굶어 죽었다.
태조 왕건 때인 942년에 일어난 일입니다. ‘거란(契丹)’은 종족의 명칭이면서 나라 이름이기도 해요. 왕건 재위기에 이미 거란이라는 나라가 있었습니다. 고려와 잘 지내자며 낙타를 선물했는데, 왕건이 굶겨 죽이고 사신들을 섬으로 유배 보냈습니다.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켰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거란을 향한 고려의 시선이 곱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야율아보기가 907년에 거란 부족을 통합하여 나라를 세우고 916년에 황제를 칭합니다. 왕건이 918년에 고려를 세우고 936년에 후삼국을 통일합니다. 그러니까 거란이 고려보다 조금 앞서 건국된 것입니다.
만부교 아래 묶여 있던 낙타들이 죽고 50년쯤 지난 993년(성종 12), 거란이 고려를 침공합니다. ‘제1차 침략’입니다. 소손녕이 이끄는 수십만의 침략군을 고려는 제대로 막아내지 못했습니다. 성종이 직접 평양에 가서 군사들을 독려했으나 소용없었습니다. 조정은 대책을 논의합니다. 긴박합니다.
평양 이북의 땅을 거란에 떼어주고 철군을 요청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습니다. 나라를 통째로 빼앗기느니 일부를 내주고 다음을 기약하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서희(徐熙, 942~998)가 강하게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결국, 서희가 소손녕과 담판을 지으려고 적진으로 가게 됩니다. 말 그대로 호랑이 굴입니다.
소손녕은 서희를 바로 만나주지 않았습니다. 조건을 내걸었어요. 무슨 조건을 내건 것인지 《고려사》를 풀어가며 말씀드리겠습니다.
소손녕이 말하기를, “내가 큰 나라의 높은 사람이니, 〈네가〉 마땅히 뜰에서 절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서희가 말하기를, “신하가 임금에게 절을 올리는 것은 예의지만, 두 나라의 신하가 서로 만나는데 어찌 이처럼 할 수 있겠소?”라고 하였다. 두세 번 〈절충하려〉 왔다 갔다 했지만, 소손녕은 허락하지 않았다.
소손녕은 처음부터 서희의 기를 꺾을 생각이었습니다. 서희에게 저 아래 뜰에서 절을 하라고 시켰습니다. 그래야 대화하겠다고 했습니다. 서희가 같은 신하끼리 무슨 절을 하느냐며 거부했네요. 소손녕은 자기한테 절을 해야만 회담하겠다고 못을 박았습니다.
어떠세요, 소손녕이 대화의 전제로 요구한 게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죠? 나라가 망할지도 모르는 위기에 그까짓 절 한번 못해주겠습니까. 회군을 요청하려고 간 건데 열 번이라도 해야지요. 그런데 서희는 거부했습니다. 소손녕이 대화에 응하지 않자, 서희는 어떻게 했을까요?
서희가 노하여 돌아와 관사에 드러누운 채 일어나지 않았다.
세상에, 이게 웬일인가요. 수십만 적군 속으로 홀로 들어간 서희, 완전 똥배짱입니다. 소손녕이 만나주지 않자, ‘에이씨, 나도 너 안 만나.’ 그러고 나와 관사에 누워버린 겁니다. 도대체 누구 처지가 급한 건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소손녕의 반응을 봐야지요.
소손녕은 마음속으로 그를 기이하게 여기고 마침내 허락하여 마루로 올라와 〈대등하게〉 예를 행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서희와 소손녕이 대등한 위치에서 대화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대개 서희의 담판 내용과 과정 그리고 강동 6주 획득이라는 결과에 주목합니다. 하지만 저는 회담 전에 벌어진 기 싸움을 더 흥미롭게 여깁니다.
관사에 누워버린 서희, ‘끝내, 소손녕이 대화를 거부하면 어떡하지?’ 속으로는 초조했을 겁니다. ‘내 생각이, 내 계산이 맞는 걸까?’ 불안했을 겁니다. 그러면서도 소손녕이 대화에 응할 수밖에 없을 거라고 여기고 있었을 것입니다. 소손녕이 절할 필요 없으니 그냥 대화하자고 했을 땐 “앗싸!”하며 제 무릎을 쳤을 겁니다. 기선제압에 성공한 서희는 이제 담판을 통해 적군을 물러가게 합니다.
서희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말도 안 되는 배짱을 부렸던 걸까요?
거란이 꼭 차지하려고 하는 곳은 고려가 아니라 송나라입니다. 그런데 고려를 먼저 친 것은 뒤통수를 맞을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입니다. 거란은 자기들이 송을 공격할 때 고려가 자기 나라의 본거지로 쳐들어올까, 우려했습니다. 앞에서 송나라가 반격하고 뒤에서 고려가 공격한다면 큰 위기에 빠질 것이 뻔합니다.
그래서 대병력으로 고려를 위협하고 굴복시켜서, 자기들이 송을 칠 때, 고려가 얌전히 있게 하려고 한 겁니다. 가능하다면, 고려와 송의 외교 관계까지 끊어 놓으려고 고려를 침공한 것입니다. 따라서 거란은 고려 땅에서 장기전을 펼칠 의도가 없었습니다. 가급적 빨리, 군사 손실을 최소화하고, 돌아가야 했습니다. 그래야 송나라를 공격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거란의 속내를 정확히 읽고 대응했던 인물이 바로 서희입니다. 관사에 누운 자신에게 소손녕이 먼저 대화를 요청해오자, ‘역시나, 너희가 꽤 급하구나.’ 확신하게 된 것입니다. 외교에서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우선 상대국의 속마음을 읽어내야 합니다.
이제 서희와 소손녕의 담판 내용을 들여다봅시다.
소손녕이 서희에게 말하기를, “너희 나라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 땅은 우리 소유인데, 너희들이 침범해 왔다. … 서희가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가 바로 고구려의 옛 땅이기 때문에, 국호를 고려라 하고 평양에 도읍하였다. 만일 국경 문제를 논한다면, 요(遼)의 동경도 모조리 우리 땅에 있는데, 어찌 〈우리가〉 침범해 왔다고 말하는가?
소손녕은 고려가 신라를 계승한 나라이고 거란은 고구려 땅에서 일어난 나라로 옛 고구려 땅은 모두 거란 땅이라고 우겼습니다. 그러자 서희가 고려야말로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이며 나라 이름 ‘고려’가 이를 증명한다고 맞섰습니다. 오히려 옛 고구려 땅이 고려의 영토이기에 지금 거란(요나라)의 중심지도 고려 땅이 될 수 있다는 듯 밀어붙였습니다. ‘고구려 얘기를 괜히 꺼냈네.’ 소손녕이 속으로 후회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요, 서희가 고구려 도읍이었던 평양을 고려의 도읍이라고 말했습니다. 고려의 도읍은 개성(개경)인데 말입니다. 이는 평양을 도읍만큼이나 중하게 여기고 있음을 표현한 것 같습니다. 고려에서 평양을 서쪽 도읍, 즉 서경(西京)이라고 했으니까요.
두 사내의 대화가 본론으로 들어갑니다. 서희가 비장의 카드를 꺼냅니다.
“압록강 안팎 또한 우리 땅인데, 지금 여진이 그 땅을 훔쳐 살면서 완악하고 교활하게 거짓말을 하면서 길을 막고 있으니, 〈거란으로 가는 것은〉 바다를 건너기보다 더 어렵다. 그동안 사신을 교류하지 못했던 것은 여진 때문이니, 만약 여진을 쫓아내고 우리의 옛 영토를 돌려주어 성과 보루를 쌓고 도로를 통하게 해준다면, 어찌 감히 국교를 맺고 교류하지 않겠는가? 장군께서 만일 나의 말을 천자께 전달해 준다면, 어찌 〈천자께서〉 애절하게 여겨 받아들이지 않겠는가?”
지금까지 고려가 거란과 교류하지 않은 것은 여진족이 거란으로 가는 길을 막았기 때문이다, 그 지역은 옛 고구려 땅이다, 그 땅을 우리 고려에 돌려주면 여진을 내몰고 길을 열어 당신네 거란과 교류하겠다. 이런 얘기입니다. 거란이 원하던 바를 서희가 콕 짚어 말한 것입니다.
해당 지역은 압록강 아래 지금의 평안북도인데요, 당시의 이 지역을 어느 나라 땅으로 보아야 하는지 역사학자 사이에 약간의 이견이 있습니다. 여진인들이 주로 살고 있으나 거란의 영역이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 적절할 것 같습니다.
거란은 서희의 뜻에 따라 고려에 땅을 내주고 철수합니다. 이렇게 거란의 1차 침략이 종결됩니다. 거란이 바보짓을 한 게 아닙니다. 더 이상의 군사 피해 없이, 시간 소모 없이, 자기네 뜻을 충분히 이루었으니까요. 고려와 거란이 같이 ‘윈윈’한 것입니다. 소손녕은 얼마나 좋았던지, 떠나면서 서희에게 낙타 열 마리, 말 백 마리, 양 천 마리, 비단 오백 필을 선물로 주고 갔습니다.
고려는 일단 거란과의 약속을 지켜서 회복한 지역의 여진인을 몰아내고 강동 6주(흥화, 용주, 철주, 통주, 곽주, 귀주)를 설치하고 성을 쌓고 거란으로 가는 길을 엽니다. 그 길로 양국의 사신이 안전하게 오가게 됩니다. 나중에 거란군이 송나라로 대군을 몰아 쳐들어갈 때, 고려는 그냥 가만히 있었습니다.
한편, 거란과 교류하겠다는 고려의 약속은 송과의 관계를 끊는다는 의미가 내포된 것입니다. 실제로 고려는 거란과 손잡으면서 송나라와 절교했습니다.
원욱을 송에 보내 군사를 빌려 작년 〈거란과의〉 전역(戰役)에 대하여 보복할 계획을 알렸다. 송은 북방 국경이 겨우 편안해졌는데 〈군사를〉 가벼이 움직이는 것은 마땅치 않다고 하면서, 다만 후한 예(禮)만 보이고 돌려보냈다. 이때부터 송과의 외교관계를 끊었다.
거란의 1차 침략 다음 해인 994년(성종 13)에 고려 성종은 원욱을 송나라에 보내서 군사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거란으로 쳐들어갈 거니까 원군을 보내달라는 겁니다. 송나라가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성종은 송나라와의 관계를 정리해버렸습니다.
‘작전’일 가능성이 큽니다. 절교 선언의 명분이 필요했을 겁니다. 고려가 진짜로 거란을 침공하려고 했을까? 아닐 겁니다. 송나라가 군대를 보내줄 리 없다고 여기고 일부러 그런 요청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고려의 외교는 치밀했습니다. 의리, 체면 이런 것보다는 국익, 현실적인 이익을 중시하고 탄력적으로 대응했습니다. 대몽항쟁기에도 물론 그렇게 했습니다. 고려의 또 다른 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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