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조선왕조실록과 정족산사고

                                                                      ▲ 이경수
                                                                       - 강화읍 출생, 거주
                                                                       - 전)양곡고등학교 역사 교사


임금이 말에서 떨어지자 

연산군은 나쁜 임금이었습니다.
그런데 실제의 연산군은 우리가 아는 연산군보다는 덜 나쁜 임금이었을 겁니다. 연산군에 대해 우리가 아는 내용은 주로 연산군의 실록(《연산군일기》)에 기록된 것입니다.


연산군을 쫓아내고 들어선 중종 조정에서 《연산군일기》를 썼습니다. ‘중종반정’의 정당성을 확보하려고 실제보다 더 나쁘게 연산군을 기록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신하들에 대한 기록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를테면, 동인이 집권했을 때 편찬된 실록에서는 서인이 나쁘게 묘사된 편입니다. 서인이 집권했을 때 나온 실록에는 동인이 나쁘게 나오고요.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이 어느 정도 사실일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조선왕조실록은 탁월한 역사서임이 틀림없어요. 세계 유명 역사서와 견주어도 전혀 꿀릴 게 없는 우리의 보물입니다. 실록에 나오는 에피소드 하나를 풀어서 소개합니다.

임금과 신하들이 더불어 사냥하러 갔다. 사냥 중에 임금이 말에서 떨어졌다. 낙마 사고에 놀란 신하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신하들을 두루 살핀 임금이 명령했다. “사관이 알게 하지 말라.”

임금은 어의(御醫)보다 먼저 사관(史官)을 찾았습니다. 사관이 안 보입니다. 그래서 안심하고 명령했습니다. 낙마 사건을 사관이 모르게 하라고. 사관이 알면 실록에 기록될 테고, 그러면 창피하니까.
아! 임금, 딱합니다. 임금이 보지 못했을 뿐, 그 현장 어딘가에 사관이 있었습니다. 사관은 임금이 낙마한 것과 사관이 모르게 하라는 임금의 명령까지 모두 기록했습니다. 그래서 실록에 실리게 되었고, 지금의 우리가 알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 임금은 누구일까요?
태종입니다. 그 무섭다던 태종 이방원입니다. 사관을 불러 “쓰지 마라, 쓰면 죽는다.” 위협할 수도 있고, 사관이 기록한 것을 가져오게 해서 없앨 수도 있을 것 같은데, 태종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다른 임금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대개, 사관이 기록하는 행위를 간섭하거나 통제하지 않았습니다. 보지도 않았습니다. 임금은 완성된 실록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관은 임금의 눈치 보지 않고 사실을 그대로 기록할 수 있었습니다.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 사관
사관이 단순히 조정의 대화만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그때그때 자기 생각과 견해도 함께 적었습니다. 잘못됐다고 판단되면 잘못됐다고 비판했습니다.


병자호란 이후인 1638년(인조 16), 인조는 강화의 읍치(邑治, 치소)를 더 안전한 곳으로 옮기려고 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강화읍에 있는 강화군청을 다른 면으로 이전하려고 한 것입니다. 신하를 강화로 보내서 후보지 몇 곳을 정하기도 했습니다. 읍치는 옮겨지지 않았습니다. 계획으로 끝났습니다.
그런데 이 상황을 기록한 사관이 자기 생각을 덧붙여 실록에 남겼습니다.

“강도(江都)를 지키지 못한 것은 전적으로 임무를 맡은 사람이 적격자가 아니어서이니, 이것이 어찌 지형이 그래서였겠는가. 그런데 지금 급급히 소재지를 옮기려 하니, …천험의 형세를 얻는다 하더라도 다시 김경징·장신과 같은 자에게 지키게 한다면 전과 같을 뿐이다. 묘당은 적임자 얻을 생각은 하지 않고, 읍만 옮기려고 힘쓰니, 아, 이상하다.”

강화유수로 있을 때 돈대에 돈사(墩舍)를 지은 사람이 조사석입니다. 조사석도 사관을 지낸 적이 있습니다. 현종 때입니다. 어느 날, 현종이 신하들과 격하게 논쟁하다가 불쑥 명령합니다. “사관은 지금 오고 간 말들을 기록하지 말라.” 역사에 남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모양입니다.


사관 조사석이 응답합니다. “비록 기록하지 말라는 분부를 받았으나, 감히 명을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그리고 전부 적었습니다. 이렇게 완성된 조선왕조실록을 우리는 가지고 있습니다.


사관의 치열한 기록 정신과 그 기록에 대한 임금의 존중! 오늘날 제대로 계승하고 있는 것인지 자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실록을 보관하는 곳, 사고
조선왕조 오백 년 그 긴 세월 한결같이 역사가 기록되고 있었다는 것도 대단하지만, 지금까지 실록이 보관되고 있다는 것도 대단한 일입니다. 조선왕조실록이 험한 세월을 견뎌내고 살아남은 과정을 살펴봅니다.
실록을 쓰고 보관하던 관청이 춘추관(春秋館)입니다. ‘춘추’는 봄과 가을이라는 뜻이지만, 어른의 나이를 높여 이르는 말로도 쓰이고 또 역사라는 뜻으로도 쓰입니다.


조선 전기에 한양의 춘추관과 충주사고·성주사고·전주사고, 이렇게 4곳의 사고(史庫)에 실록을 보관했습니다. 한 곳에만 두었다가 불이라도 나면 큰일이니까요. 이 정도면 뭐, 안전하죠.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춘추관·충주사고·성주사고를 불질렀습니다. 실록도 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전주사고만 무사했습니다. 피난길에 오른 전주사고의 실록이 여기저기로 옮겨지다가 강화도까지 왔습니다.


전쟁이 끝나면서 한질 남은 실록을 다시 인쇄하고 사고도 새로 짓습니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춘추관·정족산사고·태백산사고·오대산사고·적상산사고에 실록을 보관하게 됩니다.


조선 전기에는 사고가 4곳이었는데, 조선 후기에는 5곳이 되었습니다. 조선 전기에는 지방의 큰 도시에 사고를 설치했는데, 조선 후기에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전쟁이 또 나더라도 외적이 쉽게 발견하지 못하게 하려고 산속에 사고를 설치한 것입니다.


지금 남은 실록은 어느 사고본인지 확인하겠습니다.
춘추관 실록은 1811년(순조 11)에 화재로 불타고 말았습니다. 오대산사고 실록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끌려’갔는데, 관동대지진(1923) 때 대부분 소실됐습니다. 적상산사고 실록은 6·25전쟁 때 북한군이 가져갔습니다. 그래서 지금 남한에 남은 것은 강화 정족산사고 실록과 태백산사고 실록뿐입니다.


▲  강화 정족산 사고

강화 정족산사고
정족산성(삼랑성) 안에 정족산사고가 세워진 것은 1660년(현종 1)입니다. 지금과 거의 같은 모양을 이루게 되는 것은 1707년(숙종 33)입니다. 담장 안에 건물 두 개가 나란히 서있는데요, 긴 건물이 장사각(藏史閣)이고 작은 건물이 선원보각(璿源寶閣)입니다.


원래는 장사각 5칸, 선원보각 5칸 규모로 지으려고 했는데, 공간이 부족해서 장사각만 5칸으로 짓고, 선원보각은 3칸으로 줄여 지은 겁니다. 장사각에 실록 등을 보관하고, 선원보각에는 왕실 족보를 보관했습니다.


▲ 정족산사고 장사각과 선원보각

깊은 산중에 사고를 두면, 그걸 누가 지키나?
산속에 누가 살지요? 산적이요? 예, 산적이 살고, 또 스님들도 삽니다. 산속에는 절이 있습니다. 그래서 나라에서 사고 근처 사찰에 해당 사고 관리 업무를 맡겼습니다. 오대산사고는 월정사, 태백산사고는 각화사, 적상산사고는 안국사가 그 일을 했습니다. 정족산사고는 전등사입니다.


전등사 명부전 서쪽 기슭에 정족산사고가 있어요. 아주 가까운 거리인데 전등사 경내에서는 사고가 보이지 않습니다. 묘하게 숨은 자리입니다. 사고의 관리를 오로지 사찰에만 맡겨 둔 것은 아닙니다. 사고마다 참봉을 두어 사고 건물의 이상 유무를 살피게 했습니다. 정족산사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조선 후기에 지은 정족산사고 건물이 일제강점기까지 존재했습니다. 1931년 이후 언젠가 허물어져 주춧돌 정도만 남은 빈터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냥 무너진 것이 아니라 건물이 다른 곳으로 이건(移建)됐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럼, 지금 있는 사고 건물은? 1999년에 옛 모습과 거의 같게 복원한 것입니다.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조선고적도보(朝鮮古跡圖譜)》 11집(1931)에 정족산사고 사진이 실렸습니다. 이 사진과 발굴 결과 등을 토대로 다시 지은 것이에요.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정족산사고의 책들을 약탈해갔다는 얘기를 종종 듣게 됩니다. 전혀 그런 일이 없는데 말이죠. 잘못된 정보가 퍼진 이유가 뭘까 궁금해서 사료를 뒤적이다 보니 《고종실록》에 이런 내용이 나오더군요.
“<프랑스군이> 강화부의 갑곶진으로 곧바로 향하여 망루를 파괴하고 공해(公廨)를 불태워 버리고 백성들을 살해하고 소와 가축을 약탈하였으며 사고에 있는 책들을 배로 모두 약탈하여 실어갔다.”
‘응? 이게 뭔 소리지?’


원문을 확인했습니다. 사고(史庫)가 아니라, ‘宬籍(성적)’이라고 나옵니다. ‘宬’이라는 낯선 글자는 ‘서고’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성적’은 사고가 아니라 ‘서고의 책’입니다. 여기서 ‘서고’는 어디를 의미할까요? 정족산사고가 아니라 외규장각입니다. 외규장각을 정족산사고로 잘못 해석한 것인데, 이 오류가 그대로 퍼져나간 것 같습니다.


만약에 말입니다, 병인양요 정족산성 전투 때 조선 양헌수 부대가 패배하고, 프랑스군이 정족산성을 점령했다면 정족산사고는, 그 안에 있던 실록은, 어떻게 됐을까요?
프랑스군이 사고도 불 질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도 실록은 무사했을 겁니다. 왜냐면, 그때 실록이 정족산사고 안에 없었거든요. 《고종실록》에 이렇게 나옵니다.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방금 강화유수 이장렴이 올린 장계의 등보를 보니, ‘서양 오랑캐들이 강화부를 점거하였을 때 약탈이 장차 산성 안에까지 미치게 되자 서리 조희영 등 7인이 외따로 떨어져 있는 깨끗한 곳에 토굴을 파고 선원각과 사각에 보관되어 있던 책궤들을 모두 임시로 봉안하였는데, …”

그러합니다. 조희영을 비롯한 일곱 사람이 만약을 대비해서 실록 등을 토굴에 옮겨 감췄던 것입니다. 조·희·영, 이름 석 자, 기억하고 싶습니다.


▲ 무주 적상산사고 내부

적상산사고에 가보니
어느 카페 한 곳에 가보려고 서울·인천에서 강화에 오는 젊은이들이 많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흉보듯,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야, 카페 하나 가려고 일부러 강화까지 오는 게 말이 되냐?” 그랬더니 아들이 그러더군요. “아빤, 옛날 사람 무덤 하나 촬영하러 충청도도 가잖아.” 아, 맞는 얘기네요. 흉보지 않기로 했습니다.


작년 여름에는 적상산사고 하나 보려고 전라도 무주에 다녀왔습니다. 여러 해 마음만 먹다가 드디어 가서 사고를 보았습니다. 부러웠습니다.사고 안을 일종의 실록 전시관으로 꾸며 놓은 게 부러웠습니다. 사고 전담 해설사까지 있었습니다.


우리 정족산사고는 거의 언제나 잠겨 있습니다. 마당 안에도 들어가지 못합니다. 담 밖에서 까치발을 하고 건물을 보아야 합니다. ‘삼랑성역사문화축제’를 하는 가을에만 문이 활짝 열립니다. 사고 안에서 작품 전시회도 합니다.


평시에 대문만이라도 열려 있으면 참 좋겠습니다. 탐방객들이 사고 마당까지라도 들어가게 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차후, 사고 내부 개방과 활용 문제도 고민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수도권에서 유일하게 만나볼 수 있는 사고가 우리 정족산사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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