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역사의 숲속, 전등사

                                                                      ▲ 이경수
                                                                         - 강화읍 출생, 거주
                                                                         - 전)양곡고등학교 역사 교사


옥등을 전하여
전등사, 한자로 傳燈寺라고 씁니다. 등(燈)을 전(傳)한 절이라는 뜻이 이름에 담겼네요. 전등사가 자리잡은 산은 정족산입니다. 그런데 조선시대에는 정족산을 전등산으로도 불렀습니다. 전등사가 있는 산이라는 의미입니다.
처음 이름은 진종사(眞宗寺)였대요. 고려 충렬왕 때 정화궁주(貞和公主)가 옥등(玉燈)과 중국서 들여온 대장경 인쇄본을 시주해서, 절 이름을 전등사로 바꿨다고 합니다. ‘아, 정화궁주가 옥등을 전해줘서 전등사가 되었구나.’ 그렇습니다.
그런데요, 대장경도 등(燈)입니다. 법등(法燈)이라고 합니다. 자연의 어두움을 밝히는 게 옥등이라면, 인간의 어두움을 밝히는 게 법등이래요. 대장경을 시주해서 전등사라고 이름하였다! 이렇게 말해도 틀리지 않을 겁니다.
정말 전등사에 옥등이 있었을까요?
있었습니다.
1740년(영조 16)에 강화유수 오원이 산살구꽃 만발한 전등사에 갔습니다. 그가 지은 글에서 한 꼭지 옮깁니다. “관법당(觀法堂)에서 아침을 먹었다. 불전(佛殿)에 오래된 옥등이 있었는데, 승려가 말하기를, 정화궁주가 보시한 것이라고 하였다.” 조선 후기 영조 임금 때에도 전등사에 옥등이 있던 겁니다.


정화궁주!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녀가 누구인지 보기 전에 ‘궁주’의 의미부터 생각해봅시다. 공주는 왕의 딸, 왕자는 왕의 아들! 똑떨어지잖아요. 그런데 궁주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시대마다 쓰임이 달랐고, 특정한 원칙도 없었습니다. 신라에서 왕의 후궁이나 귀족 부인을 궁주라고 했습니다. 고려에서는 왕의 딸이나 후궁을 궁주라고 불렀습니다. 조선시대에도 그냥 어정쩡하게 쓰였습니다.
정화궁주의 ‘궁주’는 일종의 후궁을 의미합니다. ‘두 번째 부인’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만, 일단 후궁으로 정의하겠습니다. 누구의 후궁? 충렬왕의 후궁입니다. 원래는 정식 부인이었는데 나중에 후궁으로 격이 떨어졌습니다.
흔히 ‘충렬왕의 원비 정화궁주’라고 소개하는데요, 이렇게 쓰면 이해가 잘 안되죠. 원비(元妃)란 임금의 정식 부인을 말합니다. 궁주는 후궁이라고 했지요. 충렬왕의 부인 후궁? 이상합니다. ‘충렬왕의 원비였던 정화궁주’라고 해야 자연스럽고 이해도 잘될 겁니다.
원비가 후궁이 된 사연은 이러합니다.
정화궁주(?~1319)는 충렬왕이 즉위하기 전에 그와 결혼했습니다. 1남 2녀를 두었어요. 원종이 승하하고 충렬왕이 즉위하면서 자연스럽게 왕비가 되어야 하는데, 그렇게 되지 못했습니다. 즉위하기 전 충렬왕이 원나라(몽골)에서 또 장가들었기 때문입니다. 충렬왕의 두 번째 색시는 원 세조 쿠빌라이의 딸인 제국대장공주입니다.
즉위한 충렬왕이 원비를 정화궁주로 내렸습니다. ‘세컨드’인 제국대장공주를 정비(正妃)로 삼았습니다. 본부인이었던 정화궁주는 이제 제국대장공주 앞에 무릎을 꿇는 아랫사람이 되었습니다. 고려와 원의 관계상 어쩔 수 없는 현실이지만, 충렬왕은 아팠을 것입니다. 정화궁주는 더 아팠겠지요.


▲ 전등사

전등사를 찾은 이유
1276년(충렬왕 2), 정화궁주가 죽임을 당할지도 모르는 위기에 빠집니다. 무당을 시켜 제국대장공주를 저주했다는 모함을 받아서 갇히는 신세가 된 겁니다.
정화궁주를 구한 건 남편 충렬왕이 아니라, 유경이라는 신하였습니다. 유경이 제국대장공주를 설득해서 정화궁주를 석방하게 했습니다. 유경이 어떤 말을 했는지 《고려사절요》에 나옵니다. 다듬어서 옮깁니다.

“공주께서 오셔서 만백성이 안도하고 있습니다. 공주를 보내주신 황제의 은덕에 감격하고 있습니다. 정화궁주가 만약 사사로운 감정으로 공주를 저주했다면, 저주를 들은 귀신이 오히려 정화궁주를 벌할 것입니다. 은덕을 배반한 화가 반드시 정화궁주에게 미칠 것입니다.” 하였다. 유경이 눈물을 흘리며 매우 간절하게 말하니, 좌우 사람 중에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공주도 감동하고 깨달아 모두 놓아 주었다.

굴곡진 인생, 시련에 시련이 더합니다. 정화궁주, 뻥 뚫린 가슴에 스미는 바람으로 한여름에도 추웠을 것 같습니다. 도시 의지할 곳이 없어 개성에서 여기 전등사를 찾아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고종의 아들이 원종이고, 원종의 아들이 충렬왕입니다. 충렬왕은 1236년(고종 23)에 태어났습니다. 그때는 고려가 몽골과 전쟁하던 시기입니다. 고려의 도읍이 개성이 아니라 강화였던 시절입니다. 충렬왕이 태어난 곳이 바로 여기 강화라는 얘기입니다.
정화궁주가 태어난 해가 언제인지 알 수 없습니다만, 충렬왕과 나이가 엇비슷했을 겁니다. 그렇다면 정화궁주 역시 강화에서 태어났을 것입니다. 전등사가 있는 강화가 정화궁주의 고향인 것입니다. 고향 품에 안긴 정화궁주, 비로소 마음의 안정을 얻었을 것 같습니다.

해동비창불우
전등사의 본디 이름이 진종사라 했습니다. 그러면 진종사가 창건된 해는 언제일까요? 《전등본말사지》에 따르면, 381년(소수림왕 11)입니다. 아도화상이 세웠다고 합니다.
삼국시대인 381년!
전국 그 많은 사찰 가운데 서기 381년 이전에 창건된 곳은 하나도 없습니다. 현존하는 사찰 중에서 가장 오래된 곳이 전등사인 셈입니다. 그래서 ‘해동비창불우’(海東鼻創佛宇)로 불립니다.
비(鼻)자는 이비인후과(耳鼻咽喉科)나 비염(鼻炎)처럼 ‘코’라는 뜻으로 흔히 쓰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처음’, ‘시초’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나라에서[해동] 처음 창건된[비창] 절집[불우]이 ‘해동비창불우’인 것입니다. ‘천년 고찰’도 엄청나게 느껴지는데, 전등사는 천년에 600여 년을 더해야 합니다.


▲ 전등사 대웅전

역사의 향
절에 가면 향내를 맡게 됩니다. 전등사에는 향내와 함께 역사의 향이 뱄습니다. 경내 너른 숲이 그대로 역사의 현장입니다.
사찰을 빙 두른 정족산성(삼랑성)은 단군의 아들 셋이 쌓았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전설도 전설 나름, 삼랑성 이야기는 《고려사》와 《세종실록지리지》 등에 실렸습니다. 무게감이 다릅니다.
고려 대몽항쟁기에는 전등사 경내에 가궐(假闕)이 들어섭니다. 몽골에 대한 항쟁을 지속하면서 고려 왕조를 지켜내려는 염원을 담아 세운 상징적인 궁궐이 가궐입니다.
조선시대에는 사고(史庫)가 들어옵니다. 정족산사고입니다. 조선 후기 문신인 윤기(1741~1826)가 정족산사고에 온 감회를 시로 읊었습니다.


▲ 강화 삼랑성[출처 강화군청]

진종일 일행과 숲을 함께 헤매다가
전등사가 나타나니 힘든 줄 모르겠네
삼랑성 높은 성벽 옛 모습 남아 있고
정족산 높은 봉(峯)이 멀리 만(灣)을 바라보네
이곳의 경치는 조선에서 으뜸이니
예로부터 사고는 명산에 있었다네
지난날 유람했던 태백산 그곳(태백산사고)도
두 겹으로 방어하는 이곳만은 못하였네

화약 냄새 역시 역사의 향이 되었습니다. 병인양요(1866)입니다. 양헌수가 이끄는 조선군이 삼랑성에 의지해 프랑스군을 격파했습니다. 전등사를 구했고 강화를 구했고 나라를 구했습니다.
1873년(고종 10)에 강화 주민들이 ‘양헌수 승전비’를 세웠습니다. 비문 말미에 이렇게 새겼어요. “오늘날 강도 백성들이 부모와 처자 형제가 있어, 서로 보양하고 서로 기르게 된 것은 오직 공의 은혜이니 영원토록 사모하노라.” 양헌수 승전비가 원래는 대조루 입구쯤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언젠가 지금 자리로 옮겼습니다. 정족산성 동문 바로 안쪽입니다.
1908년, 전등사에서 다시 전투가 벌어집니다. 이번에는 일본군입니다. 전등사에 집결한 강화의 항일의병이 일본군을 격퇴합니다. 이 시기 강화 항일운동의 거점 가운데 하나가 바로 전등사였습니다.

소를 몰고 온 사람들
병인양요 정족산성 전투 얘기를 조금 더 하겠습니다.
기적 같은 승리의 비결이 무엇일까요? 그야 양헌수 장군의 지휘와 작전이 훌륭했고, 따르는 병사들이 잘 싸워준 덕분이지요. 여기에 더해서 지역민들의 성원과 정성도 한몫했을 것입니다.
양헌수가 군사들을 이끌고 염하를 건너 전등사에 도착했을 때, 주민들이 많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정성껏 먹을거리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 귀한 소를 보낸 이도 여럿이었습니다. 누가 시킨 게 아닙니다. 강요한 게 아닙니다. 우리 병사들 든든히 먹고 기운 내라고 자발적으로 준비한 것입니다.
생각지도 못한 강화 주민들의 성원이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우는 계기가 되었을 것 같습니다. 양헌수는 백성들이 보낸 소 가운데 검은 황소를 잡아 희생으로 올리고 산신제를 지냈습니다. 전등사 스님들은 밤새워 승리를 염원하는 기도를 올렸겠지요.
소를 보낸 이 가운데 홍진섭도 있습니다. 홍진섭은 그 일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아내 장사 지낸 지 열흘도 안 됐고 아이들마저 어린데/적병은 며칠 지나지 않아 올라올 것이니 길목마다 어렵구나/서생에게 어찌 적을 평정할 계책이 있으랴만/보잘것없는 것 드렸어도 좋은 얼굴로 맞이하네.”
불과 며칠 전 아내 잃은 슬픔에, 정신이 없을 텐데, ‘재산목록 1호’인 소를 몰고 와 양헌수에게 넘기는 홍진섭이라는 이의 마음, 그런 마음이 모여서 위대한 승리를 이루게 됐을 겁니다.
지금까지 정화궁주를 중심으로 전등사 역사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냥 단순한 절이 아닙니다. 전등사는 역사의 보고(寶庫)입니다.
어떠세요? 날은 덥지만, 한번 가보시지 않을래요?
절은 절할 사람만 가는 곳이 아닙니다. 

<저작권자 ⓒ 강화투데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최벽하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