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강화 항일의병과 진위대

                                                                      ▲ 이경수
                                                                                         - 강화읍 출생, 거주
                                                                                         - 전)양곡고등학교 역사 교사


일본의 노예가 되느니…
여기 한 소년이 있습니다.
엄마가 너무 아파요. 쌀도 떨어졌고요. 소년은 물어물어 멀리 아버지를 찾아가 도움을 청합니다. 하지만 거절당합니다. 아버지는 한 푼도 주지 않고 돌아가라고만 합니다.
아버지 아랫사람이 딱하게 여기고 몰래 돈을 주었습니다. 어머니 약값에 쓰고 쌀도 좀 사라고 했겠지요. ‘어휴, 이제는 엄마에게 약도 밥도 드릴 수 있겠구나.’
소년의 안도는 잠깐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어떻게 알았는지, 돈을 빼앗아버린 겁니다. 소년은 빈손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참 매정한 아버지입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들을 보내고 나서 뜨거운 눈물을 삼켰을 것입니다.
이 나쁜 아버지, 그이 이름이 연기우(延基羽)입니다. 강화 진위대 출신, 항일 의병장이에요. 어느 아비에게나 자식은 너무도 소중합니다. 하지만 연기우는 나라를 구하려고 자식마저 내쳤습니다. 병사들 먹이고 무기도 사야 할 군자금이라서 한 푼도 사사로이 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식 손에 들린 돈을 빼앗은 겁니다.
1910년, 나라가 망했습니다. 그래도 연기우는 여전히 싸웁니다. 독립군이 되어 곳곳에서 일본군을 무찌르다가 그렇게 하늘로 갔습니다.
항일의병, 독립군, 교과서에서 배웁니다. 신돌석, 홍범도, 김좌진, 이름도 기억합니다. 기억으로 끝내지 않고, 생각이라는 걸 한번 해봅니다. 이름 석 자 교과서에 남기지 못한 수많은 의병을, 독립군을 떠올립니다.
전투에서 이기고 지고 죽고 살고 그런 걸 떠나서, 독립이라는 열망 하나로 저 차가운 만주로 향했던 사람들. 누가 가라고 권한 것도 아닌데, 강제한 것도 아닌데, 보상이나 대가가 있는 것도 아닌데, 그런데 모든 걸 다 버리고 독립군이 된 사람들. 실로 위대합니다.
항일의병과 일본군의 전투가 치열하던 어느 날, 한 서양인이 우리 의병을 만났습니다. 의병이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어차피 죽게 되겠지요. 그러나 좋습니다. 일본의 노예가 되어 사느니보다 자유민으로 죽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결과를 떠나 그 거룩한 동기에 숙연해집니다.
1945년, 망했던 나라가 되살아났습니다. 세계대전에서 미국 중심의 연합국이 승리하고 일본이 패한 것이 주요 배경입니다. 하지만, 기꺼이 몸 바쳐 일제에 맞섰던 독립군의 피와 눈물이 이루어낸 성과이기도 합니다.
광복된 조국은 독립운동가 출신들이 주도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외면당했습니다.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어깨 힘주고 사는 세상이 되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광복된 조국은 일제에 빌붙어 자기들 이끗만 챙기던 이들이 여전히 떵떵거리는 세상이 되었고, 그 후손들이 호의호식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우리 근현대사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 하나, ‘친일파’ 문제입니다. 현시대는 어떠한가요?


▲ 강화전쟁박물관 걸개그림

강화진위대
강화 진위대원들이 “기세 당당하게 행진하여 나올 때 울리는 나팔과 북소리는 아침밥을 끓이는 처녀들이 밥 넘는 줄도 모르고 사립문 틈으로” 내다보게 했다는 표현이 저는 맘에 들어요. 그래서 자주 인용합니다. 1994년에 강화문화원이 펴낸 《증보 강화사》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처녀들만 좋아했던 게 아닙니다. 남자들도 처마 밑에 줄지어 서서 진위대 행렬을 바라보며 싱글벙글, 대견해했습니다. 전국 주요 지역에 진위대가 있었는데, 그중 강화진위대가 으뜸이었다고 합니다. 강화사람들의 자랑이었습니다. 일본군들도 이례적으로 강화진위대를 ‘군기(軍紀)가 정립되고 기개도 있었다.’라고 평했습니다.
진위대가 어떻게 등장하게 되는지 알아보지요.
1895년(고종 32)에 고종은 서울에 친위대, 평양과 전주에 진위대를 설치합니다. 1896년(고종 33)에는 강화도 등에 지방대를 둡니다. 진무영에 이어 ‘근대적’ 군대인 강화지방대가 설치된 것입니다. 지방대는 강화 외에 수원, 청주, 공주, 광주(光州), 대구, 안동, 고성(固城), 해주, 황주, 안주, 원주, 북청, 종성에 있었습니다.

“지방의 각 군대를 진위대라 하기도 하고 지방대라고 칭하기도 하는 것은 군용(軍容)을 일정하게 하는 법도가 아니니, 모두 진위대라고 부르게 하라.” 《고종실록》


▲ 이동휘와 강화진위대

1900년(고종 37)에 고종이 이렇게 명했습니다. 진위대, 지방대, 굳이 나눌 것 없이 호칭을 모두 진위대로 통일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강화지방대가 강화진위대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1903년(고종 40)에는 이동휘 참령이 강화진위대 대대장으로 부임하게 됩니다. 그랬는데, 1907년에 일제에 의해 군대가 해산당하고 맙니다.
임진왜란(1592) 때로 잠시 가볼게요. 일본 사람들은 용의주도합니다. 조선을 치기 전에 각종 정보를 입수하고, 조선의 군사력을 분석하고, 그 결과 자기네가 이긴다고 확신했기에 쳐들어왔을 겁니다. 이기기 어렵다고 여겼으면 그냥 주저앉아 다음을 기약했겠지요.
그럼에도 그들은 패했습니다. 사전 분석에서 놓친 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순신의 수군을 놓쳤고, 조선 백성의 힘을 과소평가했습니다. 관군을 아무리 격파하면 뭐합니까. 곳곳에서 의병이 덤벼드는데요. 1910년에 조선을 강탈한 방법은, 임진왜란처럼 일시에 대군을 보내 밀어버리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랬다간 그때처럼 낭패를 볼 것입니다.
일본이 택한 전략은 조선(대한제국)을 야금야금 죽이는 것입니다.
을사늑약으로 외교권부터 빼앗고(1905), 고종을 폐위시키고(1907), 내정을 장악하고, 군대를 해산하고, 사법권을 빼앗고(1909), 경찰권을 빼앗고(1910) 이어서 국권 피탈. 이렇게 대한제국이 역사에서 사라졌습니다.


▲ 연기우 공적비

우리는 해산을 거부한다!
강화진위대는 군대 해산 명령을 거부했습니다. 1907년 8월, 연기우 등 병사들은 무기고를 깨부수고 총을 들었습니다. 강화주민 수백 명이 합세했습니다. 함께 무장한 그들은 갑곶에 매복했다가 상륙하는 일본군을 공격합니다.
일본군 여러 명이 죽고 다쳤습니다. 하지만, 강화 봉기군이 밀리기 시작합니다. 저들에게 “따다다다다”, 기관총이 있는 겁니다. 아이고, 임진왜란 때는 난생처음 보는 조총으로 우리를 괴롭히더니 이번에는 기관총입니다.
결국, 일본군은 강화읍내를 장악합니다. 자기네 병사 죽은 분풀이인가, 살육을 자행합니다. 일본군과 전투를 벌인 주민과 진위대원들은 몸을 피합니다. 그들 상당수가 항일의병의 길로 나서게 됩니다. 강화 안에서도 싸우고 강화 밖으로 나가서도 싸웠습니다.
의병 아닌 척, 그냥 농부인 척 살다가 몰래 모여 일본군을 공격하고 다시 농부인 척 사는 의병들도 있었습니다. 총을 집에 두면 위험하겠죠. 강화 의병들이 평상시에 무기를 감춰두던 곳 가운데 하나가 여기저기 많았던 고인돌이었습니다. 산속 절에 무기를 감추기도 했습니다.
의병장 중에 이능권(李能權, 1864~1909)이 있습니다. 강화읍 국화리 출신으로 서울 시위대 군인으로 복무했었습니다. 고향으로 내려와 살 때 진위대가 봉기하자, 이능권도 의병을 일으켰습니다.
이능권 의병부대는 모래주머니 차고 산으로 달리는 훈련을 하면서 체력을 키웠습니다. 신출귀몰하면서 일본군을 격파했습니다. 1908년 10월에는 정족산성(삼랑성)에서 일본군을 무찔렀습니다. 단군의 보살핌이었을까요, 병인양요(1866) 때도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을 격퇴했었죠.
일본군은 정족산성 전투를 이렇게 기록했어요. “30일 오전에 강화 광성에 상륙하여 정족산 전등사에 웅거하고 있는 폭도 100여 명과 충돌, 밤낮에 걸쳐 공격하였으나 효과를 얻지 못하고 31일 밤 강화부로 퇴각, 증원대의 도착을 기다렸다.”
일본군 증원부대가 도착했습니다. 그들이 복수를 벼르며 다시 정족산성으로 몰려왔습니다. 하지만, 산성은 텅텅. 이능권 부대가 유유히 사라진 뒤였습니다. 일본군, 약올라 하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전국에서 의병들이 활약했으나 기우는 나라를 바로 세우지는 못했습니다. 나라 잃은 백성들은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1919년 3·1운동, 그때 강화에서도 거대한 만세 운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 강화전쟁박물관

강화전쟁박물관에 갈래요?
전시회를 소개합니다.
갑곶돈대 강화전쟁박물관에서 특별한 기획전시가 열리고 있습니다. 주제가 ‘강화에서 피어난 독립의 불꽃’입니다. 7월 16일에 시작됐고요, 12월 29일에 끝나는 일정입니다.
기획전시가 있을 때마다 강화전쟁박물관에 갑니다. 갈 때마다 아쉬움을 좀 느꼈습니다. 실내 전시 공간이 너무 좁아서요. 이번에는 2층 제4전시실 전체를 특별전시 공간으로 꾸몄습니다. 행사를 준비한 분들의 땀과 정성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강화의 3·1운동을 중심으로 항일의병과 근대 교육을 소개합니다. 강화군광복회가 제작한 ‘강화소년가’가 잔잔히 흐르는 역사공간에서 이동휘, 조봉암, 유봉진, 황도문, 오영섭 등을 만나게 됩니다.
일제의 탄압으로 폐교 위기에 빠진 합일학교를, 전 재산 털어 살려낸 최상현·오합나 부부도 볼 수 있습니다. 합일초등학교에 소장된, 백범 김구의 ‘弘益人間’ 글씨가 이곳에 외출 나와 관람객을 맞습니다.
시간 날 때 한번 가보시는 건 어떨까요. 전시물과 설명글을 찬찬히 둘러보고 나면, 1919년 그 뜨거웠던 강화의 봄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가신 김에 진해공원에도 들러보세요. 갑곶돈대 주차장 입구 작은 숲을 진해공원이라고 합니다. 거기 ‘순국열사 연기우 의병장 공적비(殉國烈士延基羽義兵將功績碑)’가 있습니다.
앞에서 연기우가 아들을 빈손으로 돌려보낸 이야기를 소개했습니다.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내용인데요, 여기 연기우 공적비에도 같은 내용을 새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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