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강화산성을 쌓다

                                                                     ▲ 이경수
                                                                     - 강화읍 출생, 거주
                                                                     - 전)양곡고등학교 역사 교사


강화산성, 강화부성
지금 강화읍내를 빙 둘러 돌로 쌓은 성곽이 있지요. 일부 구간은 끊어졌지만, 그래도 꽤 많이 남아 있습니다. 남산과 북산 그리고 견자산으로 이어집니다. 성을 쌓으면 사람들 드나들 출입문도 내야죠. 그래서 동문, 서문, 남문, 북문이 섰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문 근처의 마을을 ‘동문안’, ‘서문밖’ 이런 식으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 강화산성 동문

서울 한양도성의 남대문과 동대문은 사실 죽은 문이라고 할 수 있어요. 사람들이 다닐 수 없잖아요. 그런데 강화의 성문들은 지금도 주민들이 오고 갑니다. 현대인과 함께 호흡하는 살아있는 문인 셈입니다.
이 성곽이 1964년에 사적으로 지정된 강화산성(江華山城)입니다. 그런데요, 저는 ‘강화산성’이라는 공식 이름이 좀 어색하다고 생각합니다.


산성이란, 산에 쌓은 성입니다. 꼭 그런 건 아니지만, 평상시에는 민간인이 거주하지 않아요. 전쟁과 같은 위급 상황에서만 산성으로 들어가 외적에 맞섭니다. 강화에서 찾자면, 전등사가 있는 정족산성(삼랑성)이 전형적인 산성입니다.


강화산성은 산을 연결한 성곽이지만, 기본적으로 읍치를 감싼 읍성입니다. 당연히 성안에 수많은 사람이 거주합니다. 사료에서도 강화산성이라는 호칭은 거의 보이지 않아요. 주로 강화읍성(江華邑城), 강화내성(江華內城), 강화부성(江華府城)으로 칭했습니다.


이 가운데 가장 적절하다고 여기는 것은 강화부성입니다. 강화부성은 강화유수부성의 줄임말입니다. 문화유산 공식 호칭으로 ‘강화유수부 동헌’, ‘강화유수부 이방청’을 쓰고 있습니다. 강화산성도 ‘강화유수부성’ 즉 ‘강화부성’으로 이름 정했으면 좋았을 걸 그랬습니다.


조선시대 강화읍내에 성곽을 처음 쌓은 것은 세종 때였던 것 같아요. 그때는 강화유수부가 아니라 강화도호부였으니까 강화도호부성이 되는 거죠. 얼추 따져서 둘레가 2㎞ 정도였습니다. 동쪽으로 성공회성당, 서쪽으로 성광교회를 넘지 않는 범위였던 것 같습니다. 이후 보수 과정이 이어졌습니다.


그러다가 지금의 강화산성으로 확대해서 다시 쌓은 것이 숙종 때입니다. 1709년(숙종 35)에 시작해서 1711년(숙종 37)에 완공했습니다. 전체 길이는 7,122m입니다. 예전의 부성이 2㎞ 정도였는데 새로 쌓은 부성은 7㎞가 넘으니, 상당히 넓게 확대한 것이죠.


강화에는 질이 좋은 석재가 풍부합니다. 그래서 자체적으로 돈대를 쌓고 외성도 돌로 개축하고 이렇게 강화산성도 돌로 쌓을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김포 문수산성도 강화의 돌을 옮겨다 쌓은 것입니다.


▲ 강화산성 남산 구간

남산을 어찌하리
강화산성을 쌓기로 결정한 것은 오래전이었습니다. 여러 해 뜸을 들이다 뒤늦게 시작한 겁니다. 왜 그랬냐면, 조정에서 의견이 갈렸기 때문이에요. 무슨 의견이 갈렸느냐. 남산이 문제였습니다.


남산을 포함해서 넓게 쌓을 것이냐, 아니면 남산 빼고 동락천 북쪽으로만 쌓을 것이냐. 숙종은 남산을 포함해서 쌓아야 한다고 했지만, 신하들 대부분이 반대했습니다. 노동력과 경비가 너무 많이 들어가는 걸 걱정한 겁니다.


남산까지 포함하려면 성곽이 동락천을 건너야 하고 그러려면 동락천 아래위로 수문까지 세워야 합니다. 신하들은 수문 건설의 어려움도 이야기했습니다. 결국, 타협이 이루어졌습니다. 남산 빼고 예전의 부성보다 조금 크게 사각형 모양으로 성곽을 쌓고, 견자산과 남산에는 각각 사각형 모양의 작은 성, 그러니까 돈대 같은 걸 쌓기로 한 것입니다. ‘品’ 자 모양의 강화산성이 만들어지는 겁니다.


1709년(숙종 35)에 일단 공사가 시작됐습니다. 그때 강화유수는 박권입니다. 1710년(숙종 36), 숙종은 민진원(閔鎭遠, 1664~1736)을 강화유수로 임명합니다. 민진원은 이미 1705년(숙종 31)부터 1707년(숙종 33)까지 강화유수를 지낸 사람이에요. 그때 선두포 축언을 해냈습니다. 근데 다시 유수로 온 겁니다.


민진원이 부임해서 공사 현장과 지형을 두루 살펴봅니다. ‘아, 이건 아니다.’ 남산을 포함해서 쌓아야만, 부성의 기능을 제대로 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래서 궁궐로 들어가 임금과 대신들 앞에서 남산을 포함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그러자 영의정 이여가 말했습니다.
“남산을 포함하게 되면 쌓는 일이 갑절로 늘어납니다. 성이 너무 넓으면 지키기도 어렵습니다. 그래서 줄여서 쌓기로 정했던 것입니다.”


우의정 김창집도 말합니다.
“소신이 일찍이 형세를 보았는데, 남산에서 정자산까지 둘러쌓으면 공역(功役)이 매우 클 것입니다.”
영의정과 우의정이 남산을 제외한 축성을 다시 말했습니다. 그러자 숙종이 전 강화유수 박권의 의견을 물었습니다.


박권이 대답합니다.
“만약 남산을 포함한다면, 수문 두 개도 크게 설치해야 하는데 공력이 너무 과하게 듭니다. 신이 본부의 장교들과 거듭 지세를 살펴보고 터전을 헤아려 보았는데, 남산에는 작은 성을 쌓고 정자산에는 돈대를 설치해서 부성과 품(品)자를 이루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민진원 편을 들어주는 이는 한 명도 없었습니다. 숙종은 대신들의 뜻을 따랐습니다. 원래 계획대로, 남산 빼고 부성을 쌓으라고 재차 지시했습니다. 이제 민진원은 조정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맥빠진 상태로 강화로 돌아옵니다.


밤을 새우며 생각합니다. 고민합니다. 품(品)자 성을 쌓으면 외적의 침략시 강화를 지킬 수 있나? 만약 외적이 부성을 공격하기 전에 남산과 견자산의 돈대부터 점령한다면? 남산과 견자산에서 읍내 부성을 내려다보며 포격을 한다면?


백번을 생각해도 아닙니다. 죽 쒀서 개 주는 꼴이 될 수 있다, 품자 성은 위험하다, 남산을 포함해서 쌓아야만 지킬 수 있다! 민진원의 결론입니다.


지금 제가 민진원이라고 가정해 봅니다. 제 생각은 남산 포함해서 하나의 부성을 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임금과 대신들이 반대합니다. 그렇다면, ‘에이, 모르겠다, 그냥 시키는 대로 하자.’ 이렇게 맘먹고 품(品)자 성을 쌓았을 겁니다.


하지만, 민진원은 달랐습니다. 다시 입궐합니다. 숙종에게 아룁니다. “신이 밤낮으로 헤아려 보고 品자 성이 절대 옳지 않음을 알았습니다.” 그럼 뭐하나요, 조정 대신 모두 반대하고 있는데….


그런데 반전! 이번에는 대신들이 반대하지 않습니다. 민진원의 뜻에 동의했습니다. 민진원이 임금에게 가기 전에 먼저 대신들을 만났던 겁니다. 자기 소신을 거듭 밝히며 설득했습니다. 이리저리 다 따져보니 작은 성 세 개 쌓는 거나, 큰 성 하나 쌓는 거나, 들어가는 인력·물력이 별 차이 없다고도 말했습니다. 그래서 신하들도 민진원의 뜻을 따르게 된 것입니다. 숙종은? 당연히 찬성이지요. 애초 남산을 포함해서 부성을 쌓으라고 했던 숙종입니다.


이제 민진원 유수의 뜻대로 남산을 포함한 하나의 부성을 쌓게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지금의 강화산성이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축성 기간을 다시 따져봅니다. 이론상 1709년(숙종 35)부터 1711년(숙종 37)까지 햇수로 3년 걸렸습니다.


그런데 민진원 유수 주도로 쌓은 시기만 축성 기간으로 보는 게 더 실제에 가까울 겁니다. 민진원이 강화유수로 임명된 때가 1710년(숙종 36) 4월입니다. 윤7월에 돌 뜨기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다음 해 1711년(숙종 37) 1월부터 본격적인 축성 작업이 이루어진 것 같습니다. 그리고 4월 말쯤에 완공합니다. 그러니까 순수 축성 기간은 대략 4개월이었습니다.


품(品)자 성이 옳은지, 그른지를 떠나서, 민진원 유수, 훌륭하다고 평하고 싶습니다. 강화유수로서 소신 갖고 제대로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위에서 시키는 대로 적당히 하다가 임기 마치고 떠나도 그만인데, 그는 진정으로 나라를, 강화도 방비 시설의 효율을, 고민하고 또 실천합니다. 필요하다면 윗사람들과의 대립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강화산성은 누가 쌓았을까?
돈대는 승군과 어영청 군대가 쌓았고, 강화외성은 삼군문, 그러니까 금위영·어영청·훈련도감 병력이 쌓았다고 했지요. 그러면 강화부성을 쌓은 이들은 누구일까요?


의외로 강화산성 쌓은 이들이 누구인지 명확하지 않네요. 정확한 기록이 찾아지지 않습니다. 다만, 관련된 사료들을 종합해 볼 때, 강화 주민들이 직접 쌓은 것 같습니다. 조정의 관련 논의를 따라가 보지요.


1685년(숙종 11)에 숙종은 삼군문이 합심해서 강화부성을 쌓으라고 하면서 우선 금위영 병력을 투입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이때는 축성 작업이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1708년(숙종 34), 조정에서 강화 주민에게 쌓게 하자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그러자 당시 공조참판이던 민진원이 반대합니다. 강화 백성만으로는 쌓기 어려우니 조정에서 수만 명의 군정을 징발해서 보내줘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예조판서 이인엽은 돈대 쌓을 때처럼 승군을 쓰는 게 좋겠다고 말합니다.


신하들 이야기를 다 들은 숙종이 정리합니다. “강도 백성만으로 축성하기 어려우니 승군을 징발하여 쓰되 삼군문에서 협력하여 일을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


숙종의 말을 따르면, 강화 백성과 승군과 삼군문을 모두 축성 작업에 투입하는 것이 됩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1709년(숙종 35) 2월, 축성이 임박한 시점, 조정에서는 여전히 논의가 분분합니다.


숙종의 명으로 강화도에 와서 두루 살피고 돌아간 부호군 조태구가 말합니다. “강화의 남정이 9,000명이니 이들에게 쌓게 하면 될 것입니다. 굳이 승군까지 동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랬더니 숙종이, 삼군문에서 물력(物力)을 돕도록 하고, 부성 쌓는 것은 본부(강화유수부)가 책임지고 하라고 명했습니다.


강화 주민, 승군, 삼군문을 모두 불러 쓰라고 했던 숙종이 생각을 바꾼 겁니다. 강화유수부가 책임지고 쌓되 경비는 삼군문에서 보태주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강화 주민들이 강화산성을 쌓은 것입니다.


강화유수 권한으로 동원할 수 있는 노동력이 강화 말고 또 있을까요? 있습니다. 강화유수는 진무영 진무사입니다. 진무영에 속한 인근 외영 고을에서도 일정 규모의 인력을 불러들여 강화산성 축성 공사에 투입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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