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강화유수 이안눌과 벗 이야기

 ▲ 이경수
- 강화읍 출생, 거주
- 전 양곡고등학교 역사 교사


비석치기

▲ 강화전쟁박물관 비석군

갑곳리 강화전쟁박물관 마당에 옛 비석이 수두룩 모여있습니다. 대개가 조선시대 수령의 선정비입니다. 선정비를 불망비라고도 해요. 백성들이 그 지방에 부임했던 지방관의 선정을 고마워하며, 오래도록 기억하고자 세운 비가 선정비, 불망비입니다.
선정(善政)이란 ‘백성을 바르고 어질게 잘 다스린 정치’라는 뜻이요, 불망(不忘)이란 그 은혜를 잊지 않겠다는 뜻이니 결국은 그 말이 그 말입니다. 선정비가 많은 것은 그만큼 선정을 베푼 지방관이 많았다는 것일까요?
물론, 아니죠. 선정 여부와 관계없이 관례로 세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백성을 괴롭혀 원성이 자자했던 수령의 선정비도 세워지기 마련입니다. 선정비 세우는 비용은 백성들에게 걷습니다. 필요 이상으로 많이 거두기도 해서 백성들이 아주 고통스러웠습니다.
수령이 자주 바뀔수록 백성의 부담은 더 커집니다. 1859년(철종 10), 철종이 엄히 명합니다. “수령들의 임기를 모두 채우게 하라.” 철종은 수령이 자주 바뀌면 영송(迎送, 맞음과 보냄)에 폐단이 생긴다고 했습니다. 그 폐단 가운데 하나가 바로 선정비 세우는 거고, 그 비용 대기에 백성들이 죽어나는 것입니다.
악정(惡政)을 펼친 수령의 선정비는 주민의 미움을 받기 마련입니다. 몹시도 백성을 쥐어짜던 수령, 그를 잊고 있다가도 선정비를 보게 되면 울화가 치밀겠지요. 비석에 슬쩍 돌을 던지며 욕할지도 모릅니다. 장난감 귀하던 우리네 어린 시절, ‘비석치기’를 하고 놀았습니다. 비석치기가 못된 수령의 선정비에 몰래 기와 조각이나 돌을 던지면서 시작된 놀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부사·부윤·유수, 이안눌

▲ 이안눌 유수 선정비(강화전쟁박물관)

강화전쟁박물관의 저 많은 선정비 가운데 강화 주민들이 진정 감사하는 마음으로 세운 것이 어떤 것일까? 다 알기 어렵습니다만, 이안눌 선정비는 ‘진짜’일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안눌 선정비는 두 개입니다. 비문을 확인해보면, 두 개인 이유를 알게 됩니다. 1620년(광해군 12)에 세운 선정비는 行府尹李公安訥淸德善政碑(행부윤이공안눌청덕선정비)라고 새겼고요, 1631년(인조 9)에 세운 선정비는 留守李公安訥氷淸玉白恩愛將卒大開軍營不忘之碑(유수이공안눌빙청옥백은애장졸대개군영불망지비)라고 새겼습니다. 부윤으로 한번, 유수로 한번, 이렇게 두 번을 강화의 수령으로 근무해서 선정비가 두 개인 겁니다.
조선 초 강화도는 고려 말 이래 부사(府使)가 다스리는 강화부였습니다. 1413년(태종 13)에 강화부의 명칭이 강화도호부로 변경됩니다. 이때 수령을 도호부사라고 했는데 줄여서 그냥 부사라고 했습니다. 1618년(광해 10)에는 강화도호부의 수령이 도호부사에서 부윤(府尹)으로 바뀝니다. 그랬다가 1627년(인조 5)에 강화유수부가 서면서 수령도 부윤에서 유수로 바꿔 부르게 됩니다.
이안눌은 1617년(광해군 9) 6월에 강화부사로 임명됩니다. 강화부사로 근무하던 1618년(광해군 10) 6월에 광해군이 강화 수령을 부사에서 부윤으로 올리면서 얼떨결에 초대 강화부윤이 됩니다. 1628년(인조 6)에 비변사에서 인조에게 청하기를, “이안눌이 일찍이 본부의 부윤이 되어 능하다는 명성이 있어서 백성들이 지금까지도 그리워하고 있으니” 강화유수로 삼자고 합니다. 인조가 비변사의 뜻에 따라 이안눌을 강화유수로 보냅니다.
동악 이안눌(李安訥, 1571~1637)은 1599년(선조 32), 29세에 과거에 급제해서 벼슬에 나아갔습니다. 지방 수령을 여러 곳에서 오래 했어요. 학자이자 관료이자 대문장가였습니다. 특히 시를 잘 지어 이름이 높았어요. 석주 권필처럼 말이지요.



시로 읽는 이안눌

이제 이안눌의 시를 통해 그가 어떤 수령이었을지 짐작해봅니다.
담양부사 마치고 담양을 떠날 때 지은 시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토호들은 밀면서 갔으면 하고 / 백성들은 당기며 머물렀으면 하네 / 강한 이들 헐뜯음이 다투어 일고 / 약한 이들 눈물이 줄줄 흐르네” 임기 끝나서 돌아가는 부사. 백성들은 울며 안 갔으면 하고, 지역 양반 세력가들은 어서 가라며 욕합니다. 이안눌이 어느 편에 서서 부사 직을 수행했는지 알만합니다.
강화에서는 이런 시를 지었습니다. 밥을 넘기는 게 죄스럽다, 강화 백성들 죽조차 먹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이보게, 내게 밥 많이 드시라 말하지 말게, 하면서 “마을 사람들 굶주리고 있지 않은가 / 차라리 내 몸의 피를 빼내어 / 그대의 숟가락에 떨어뜨려서 / 늙은이 어린아이 모두 맘껏 마시면 / 배고픔도 없고 목마름도 없겠지”
굶주리는 강화 백성을 걱정하느라 밥 한술 제대로 뜨지 못하는 수령 이안눌의 마음, 제 피를 뽑아 백성에게 주고 싶다는 절절한 수령의 심정! 현재의 강화도 주민이 과거의 이안눌 강화유수에게 말합니다. “고맙습니다.”
글의 느낌과 그 글을 쓴 사람의 언행이 전혀 다르게 나타나는 경우가 있습니다만, 그래도 이안눌 부윤이, 이안눌 유수가 강화 주민들에게 선정을 베풀려고 노력했다는 걸 믿습니다.

▲ 명륜당 창건비(강화향교)

이안눌을 알려주는 옛비가 또 하나, 강화향교 앞마당에 있습니다. 몸돌 받친 거북돌이 수백 년 풍상에 동글동글 닳았어요. 비문도 마모돼 읽을 수 없습니다. 그래도 비문이 기록으로 따로 전해지는 덕분에 내용을 알 수 있습니다. 留守李公安訥創建明倫堂碑(유수이공안눌창건명륜당비)입니다. 강화유수 이안눌이 강화향교 명륜당을 새로 지은 내력을 기록했습니다.
자, 이제 얘기를 조금 바꿔봅니다.

나쁜 세상 사는 게 한스럽지 않으나
귀가 있음은 한스럽구나
그대 죽었다는 소리 들어야 하니

나쁜 세상 사는 게 한스럽지 않으나
눈이 있음은 한스럽구나
다시는 그대 볼 수 없으니


이안눌이 남긴 시의 번역문을 살짝 윤문했습니다. 이안눌은 ‘그대’가 죽은 걸 몹시 서러워합니다. 귀가 한스럽고 눈도 한스럽습니다. ‘그대’를 위한 애도 시를 이 한 편만 쓴 게 아니에요. 매일 매일 생각하고 눈물지으며 오랜 세월 오래도록 수십 편을 지었습니다. 얼마나 사랑했기에 그랬을까. 이안눌의 ‘그대’는 어떤 여인일까요?
여인이 아닙니다. 권필입니다. 지난 호에서 이야기했던 그 석주 권필입니다. 이안눌은 권필의 죽음을 알고 처절하게 슬퍼합니다. 권필을 세상에 하나뿐인 친구라고 했고 심지어 동심인(同心人)이라고도 했습니다. 동심인!
둘의 우정은 열 살 무렵 시작되었습니다. 놀 때도 같이 공부도 같이. 마음마저 실과 바늘이었습니다. 권필이 강화로 온 이후에도 수시로 연락이 오갔어요. 권필은 관직 생활하는 이안눌을 늘 격려하고 성원했습니다. 둘은 상대의 기쁨을 자신의 기쁨으로 여겼습니다. 슬픔도 물론 그랬고요. 진짜 평생 친구였습니다. 권필은 이안눌을 정 깊은 유일한 친구라고 표현했습니다. 친구 하늘로 보내고 땅에 홀로 남은 이안눌이 이런 시도 지었습니다.

바다 가운데 홀로 솟은 산 꽃비가 내리고
백팔 개의 염주 꿰어 잡고 좌선에 드네
뜬세상 마음 상한 숱한 사연 끝이 없고
홀로 남긴 글귀 읊조리며 시선(詩仙)을 떠올리네.


▲ 정수사

▲ 적석사 전경

‘바다 가운데 홀로 솟은 산’은 어디일까요. 마리산입니다. 시에 ‘염주’와 ‘좌선’이 나오니 절이겠네요. 그렇습니다. 정수사입니다. 이안눌이 시간 쪼개 정수사에 갔습니다. 백련사도 가고 적석사도 가고 전등사도 갔습니다.
산사를 찾은 중요한 이유는 권필의 흔적 찾기! 권필이 다니던 절을 찾아 권필과 어울리던 스님들에게 권필 얘기를 청해 들었습니다. 권필이 산사에 남긴 시를 받아 읽으며 추억했습니다. 위 작품은 이안눌이 정수사에 가서 권필이 지어 남긴 시를 받아 읽고 지은 시입니다. ‘시선(詩仙)’은 권필을 가리키는 것이겠네요.
나이 먹어갈수록 친구가 중요하다고 합니다. 사람을 한자로 ‘人’이라고 표현하잖아요. 혼자는 제대로 서기 어려워 누군가와 서로 의지해서 선 모양새입니다. 그 ‘누군가’는 연인일 수도 있고 남편이나 아내일 수도 있고 또 친구일 수도 있습니다. 친구 많음은 자랑할 게 못 된다고 합니다. 진정한 친구는 한둘이면 족할지도 모릅니다. 혹시 한동안 잊고 있던 친구가 떠올랐나요? 그렇다면.
“잘 지내지?” 카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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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벽하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