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정치 9단

김학준
전) 서울신문 기자



바둑계에서 9단은 ‘입신(入神)’으로 불린다.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뜻이다. 하지만 바둑 사관학교 격인 연구생제도가 정착된 뒤 탄탄한 기량을 갖춘 입단자(초단)들이 등장하면서 사정이 크게 달라졌다. 초단이 9단을 이기는 경우가 빈번해 오히려 “9단이 초단을 이기면 이변”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초단은 ‘수졸(守拙)’로 불리는데, 겨우 자기 집이나 지킬 정도라는 뜻이다. 그런데 집에 머물지 않고 밖에 나가 신을 이기니 이보다 더한 반전은 없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정치 9단들이 꿈틀거리고 있다. 정치권 막전막후를 주름잡으며 일찍이 정치 9단 반열에 올랐던 박지원 전 의원이 고향인 전남 진도에서 출마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때문에 그 지역에서 표밭을 가꾸던 정치 신인들이 난감해 하고 있다. 80세가 넘은 그는 국회의원(3선), 대통령 비서실장, 장관(문화체육부), 국정원장 등 화려한 공직을 두루 거쳤지만 아직도 미련이 많은 것 같다.

그는 지난 2020년 4·15총선에서 자신의 텃밭인 전남 목포에 출마했지만 정치신예인 김원이 후보에게 많은 표차로 패배했다. 박지원의 나이로 볼 때 더 이상 정치는 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하지만 관운을 끝나지 않았다. 그해 7월 문재인 대통령에 의해 국정원장으로 발탁돼 2년간 재직했다.

그 뒤 정치평론가로 탈바꿈해 TV 시사프로그램에서 특유의 재치있는 입담으로 인기를 끌며 또 다른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그런데 기필코 다시 정치를 하겠다고 나서니 범부의 입장에선 이해되지 않는다. 역시 출세하는 사람을 평범한 사람의 시각에서 바라본다는 것 자체가 순진한 짓이다. 그래서 ‘범부’라는 소리를 듣는다.

그는 TV에서 “지금까지는 국가를 위해 봉사했지만 마지막으로 고향에 봉사하고 싶다”고 출마 의지를 밝혔다. 그의 정치 여정을 돌이켜보면 과연 ‘봉사’ 했는지는 의문이 들지만, 출마하더라도 민주당 깃발만 꽂아도 당선되는 호남이 아니라 수도권에 출마하는 것이 그나마 명분 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 2020년 총선은 정치 9단들의 무덤이었다. 천정배 의원은 7선의 문턱을 넘어서지 못했고, 2007년 대선 후보까지 지낸 정동영 의원은 5선 길목에서 쓴맛을 봤다. 정동영(전북 전주)과 천정배(광주 서구)는 자신의 안방에서 무명에 가까운 후보에서 완패당했다.

또 당시 최다선(8선)이었던 서청원 의원도 9선에 실패했으며, 5선인 심재철 미래통합당 원내대표 역시 자신을 키워준 경기 안양에서 외면받았다. 이 외에도 정치 9단이 초단급에게 패한 경우는 헤아릴 수 없다. 이제 정치를 그만둘 때가 됐다는 유권자들의 신호일 것이다.

나이도 나이지만 정치지형이 완전히 달라져 이들 중 상당수는 정가를 떠날 것으로 전망됐지만 사정은 딴판이다. 정동영 전 의원은 이른바 ‘올드보이의 귀환’에 대해 민주당 일각에서 부정적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과 관련해 “중요한 건 노선이지 다른 것은 기준이 될 수 없다”며 나이로 정치 적합성 여부를 따지면 안된다고 강조했다.

사실상 내년 총선 출마 선언이다. 과거 자신의 지역구였던 전북 전주 출마를 준비하고 있다는 얘기가 나온다. 정동영은 지난 총선 전날 “이번 총선이 마지막 선거”라고 배수진을 쳤으나, 선거 결과가 나온 뒤에는 “(향후 진로는) 천천히 생각하겠다”며 말을 바꿨을 때 이미 예상된 행보다.
역시 대표적인 정치 9단으로 노무현 정부 때 법무부 장관을 지낸 천정배 전 의원은 양향자 의원의 탈당으로 무주공산이 된 광주 서구 출마가 유력하다. 천정배는 “2년 뒤에(2022년 대선) 호남대통령 못 만들면 정계은퇴하겠다”고 말한 바 있다. 민주당 내부에선 “흘러간 물은 되돌릴 수 없다”며 586세대도 퇴진 압박을 받고 있는 마당에 그들보다 윗세대 인물들의 재등장에 탄식이 나오고 있다.

9단은 9단다워야 한다. 바둑 9단은 비록 기술에서는 후배들에게 밀려도 품격은 유지해 후진들이 어려워 한다. 하지만 정치 9단은 어떤가. 귀감이 되기보다는 노회함와 변신의 처세술로 조롱의 대상이 되기 일쑤다. 우리나라 정치가 ‘3류’로 불리며 비난의 대상이 된 데는 누구보다 9단들의 책임이 크다. 물러날 때를 아는 것이 그리도 어려운가.

고구려 장군 을지문덕이 고구려를 침략한 중국 수나라 장수 우중문에게 보낸 시를 인용한다.

“그대의 귀신같은 꾀는 하늘의 이치를 다했고(神策究天文)
기묘한 계략은 땅의 이치를 통달했네(妙算窮地理)
전쟁에 이긴 공이 이미 높으니(戰勝功旣高)
만족함을 알고 그만 돌아가는 것이 어떨까(知足願云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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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벽하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