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미군의 침략, 신미양요

                                                                      ▲ 이경수
                                                                                     - 강화읍 출생, 거주
                                                                                     - 전)양곡고등학교 역사 교사

등거리 외교
等!
‘등급 등’이라는 한자입니다. 1등, 2등, 할 때의 그 ‘등’입니다. 그런데 等 자에 ‘같다’는 뜻도 있어요. 그래서 등거리(等距離)는 같은 거리라는 의미가 됩니다.
‘등거리 외교’란 이 나라 저 나라에 같은 거리를 두고, 한쪽으로 기울지 않고, 외교하는 걸 말합니다. 국어사전은 ‘어떠한 나라에도 치우치지 아니하고 각 나라마다 동등한 비중을 두면서 중립을 지향하는 외교 정책’이라고 등거리 외교를 정의합니다.
고려는 등거리 외교라고 할만한 대외정책을 펼치며 나라의 안정과 부강을 꾀했습니다. 조선 광해군도 비슷했지요.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중립 정책을 썼습니다. 인조가 쿠데타로 즉위하고 명나라로 확 기울어버리는데, 이게 정묘·병자호란의 한가지 원인이 됐습니다. 역사는, 어느 한쪽 나라에 ‘올인’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교훈을 전합니다.
미국은 우리나라 최고의 우방이고 6·25 전쟁에서 큰 도움을 준 나라입니다. 그런데 그들과 우리의 첫 만남은 전쟁이었습니다. 바로 신미양요이지요. 지금 미국과 일본의 관계가 매우 친밀하고 돈돈하지만, 그들 양국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서로 싸우던 적국이었습니다.
나라와 나라의 관계가 항상 같을 수는 없습니다. 국익을 기준으로 언제든 양상이 바뀔 수 있는 겁니다. 의리, 정(情), 명분, 이런 것으로 규정할 수 없는 것이 국제관계입니다. 우리나라 외교가 유연하고 지혜롭게 그리고 냉철하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 미군함 모노카시호

미군, 오다
1866년(고종 3)에 프랑스군이 정족산성 전투에서 참패하고 퇴각했습니다. 5년이 흘렀습니다. 1871년(고종 8) 신미년, 이번엔 미군이 쳐들어옵니다. 또 강화도입니다.
프랑스가 자기 나라 신부 처형에 대한 책임을 묻겠다는 구실로 조선을 침략했었죠. 미국은 자국 선박 제너럴셔먼호를 격침한 책임을 묻는다는 형식으로 조선을 침공했습니다.
병인양요 얼마 전, 미국 국적으로 분류되는 제너럴셔먼호가 대동강을 멋대로 거슬러 올라와 행패를 부린 일이 있습니다. 심지어 우리 백성 여럿을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장삿배라고 하지만, 배 안에 대포가 있었고 선원들도 무장한 상태였어요. 결국, 평안감사 주도로 조선 백성들이 제너럴셔먼호를 불태웁니다.
1871년(고종 8) 신미년 5월 16일(양력), 일본 나가사키 항을 출발해 조선으로 향한 미국 함대는 다섯 척 군함에 병사 1,230명 규모였습니다. 대장 배인 기함 콜로라도호, 알래스카호, 베니시아호, 모노카시호, 팔로스호입니다. 이들을 로저스 제독이 지휘했어요.


▲ 어재연 장군 초상(강화역사박물관)

5척 군함 가운데 강화도 침공에 직접 투입된 배는 모노카시호와 팔로스호입니다. 상대적으로 가벼운 배들입니다. 염하가 깊지 않아서 무겁고 큰 배는 함부로 들어올 수 없었거든요.
6월 1일, ‘손돌목 포격 사건’이 터집니다. 병인양요 이후 조선은 외국 선박의 염하 진입을 금했습니다. 그런데 미 군함이 함부로 손돌목까지 올라온 겁니다. 바닷물의 흐름과 깊이 그리고 경계시설 등을 살피려는 의도였습니다. 명백한 침입행위입니다.
손돌목의 조선군이 미군함을 향해 먼저 화포를 쏘았고, 미군이 대응 사격하면서 쌍방 치열한 포격전이 벌어졌습니다. 조선군의 기세에 눌린 미 군함이 남쪽으로 물러났습니다. 미군은 조선에 사과를 요구했습니다. 조선은 거부했습니다.
침략자와는 그저 싸울 뿐, 타협은 없다! 대원군 뜻이 이러했습니다. 손돌목 포격 사건 이틀 뒤인 6월 3일, 어재연(魚在淵, 1823~1871)이 수백 명 병사를 이끌고 광성보에 옵니다. 대원군이 그를 진무중군으로 임명해서 강화로 보낸 겁니다.
진무중군은 진무영의 중군이라는 의미입니다. 진무영의 수장은 진무사입니다. 강화유수가 진무사를 겸합니다. 진무사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서 강화부성(강화산성)을 지키며 조정과의 연락 업무를 맡고 있는 상황입니다. 하여 광성보의 총지휘관은 중군 어재연입니다. 이건창은 어재연을 “체격이 장대하고 철인(鐵人)의 힘이 있어서 세상 사람들이 그를 장사로 여겼다.”라고 기록했습니다.


▲ 광성보 손돌목돈대

광성보 전투
6월 10일, 미군이 초지진을 점령합니다. 초지진을 방어하던 조선군은 미군의 함포 사격에 눌려 후퇴하고 말았습니다. 초지진에서 하룻밤 묵은 미군이 다음 날인 6월 11일(음력 4월 24일)에 덕진진마저 무너트립니다. 이어서 광성보를 공격합니다.
미군이 초지진에서 군함 타고 올라와 덕진진을 점령하고 또 군함 타고 올라와 광성보에 상륙한 것이 아닙니다. 초지진에 상륙한 뒤, 육로로 덕진진 거쳐 광성보까지 온 것입니다.
광성보를 향해 미군이 포를 쏘아댑니다. 염하 따라 올라온 군함에서도 사격이 계속됩니다. 어재연 부대는 동·서 양쪽의 포격을 견뎌내며 버팁니다. 그리고 밀려드는 미군과 끈질긴 백병전을 펼칩니다. 물러섬 없는 처절한 전투였습니다.
하지만, 광성보마저 적에게 떨어지고 맙니다. 조선군 전사자는 어재연 장군을 포함해서 350여 명, 미군 전사자는 3명이었다고 합니다. 광성보 전투는 조선군의 패배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어재연과 그의 병사들을 숭모하는 것은, 나라와 백성을 위해 하나뿐인 목숨을 내놓고 외적에 맞서 싸웠기 때문입니다.
병자호란 당시 강화를 지키던 책임자인 검찰사 김경징과 강화유수 장신은 청나라 군대가 갑곶으로 접근하자 바로 달아났습니다. 병인양요 때 강화유수 이인기도 프랑스군이 부성으로 몰려오자, 서문을 열고 도망갔습니다. 심지어 일반 백성 복장으로 변장하고 줄행랑을 쳤습니다.
미군은 승리했습니다. 초지진, 덕진진, 광성보를 차례로 점령했습니다. 그래도 환호하지 못했습니다. 이겼는데도 기가 꺾인, 그런 상태였습니다. 광성보 조선군의 저항이 워낙 강력하고 처절했기에 싸우면서 질린 겁니다.
다음 날, 6월 12일, 미군은 강화도에서 철수해서 정박지인 인천 물치도로 돌아갔습니다. 물치도는 작약도로 불리던 섬이에요.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물치도에 작약도라는 이름을 붙여서 최근까지 그렇게 호칭했던 것인데, 이제 옛 이름을 살려 물치도라고 합니다.
6월 10일 초지진 점령, 6월 11일 덕진진과 광성보 점령, 6월 12일 철수. 미군이 강화에 상륙해 일을 벌인 기간은 딱 사흘이었습니다. 강화읍내로 진격하지 않았습니다.
원래는 강화부성까지 쳐들어갈 계획이었는데, 조선 병사들의 위세에 눌려서 포기하고 돌아갔다는 식으로 말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지는 않습니다. 애초 미군의 침공 계획이 광성보까지만 이었습니다. ‘이 정도만 우리 힘을 보여주면, 조선 조정이 굴복하고 개항하겠지.’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의 생각과 달리, 조선 조정은 꿈쩍도 안 했습니다. 결국, 미군은 조선 개항이라는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물치도에서 철수합니다. 광성보 전투 치르고 20여 일 흐른 7월 4일입니다. 이렇게 신미양요가 끝났습니다. 떠나가는 미 군함에 우리 수자기(帥字旗)를 비롯한 각종 군기와 무기 등이 실려있었습니다.


▲ 김현경 묘

진무천총 김현경
강화에서 미군이 철수한 뒤 강화유수가 조정에 상황을 보고합니다. 《고종실록》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보루는 텅 비었고 흙 참호는 모두 메워졌기에, 즉시 마을 사람들을 동원하여 흙을 파냈더니 중군 어재연과 그의 친동생 어재순, 대솔군관 이현학, 겸종 임지팽, 본영 천총 김현경이 피를 흘리고 참호 속에 묻혀 있었습니다.”

본영 천총은 진무영 천총을 말합니다. 천총은 중군 아래 장수입니다. 병인양요 때 순무사 이경하, 순무중군 이용희, 그리고 순무천총 양헌수였습니다. 순무사 이경하는 한양 조정에, 중군 이용희는 김포 통진부에 있었고, 군사를 지휘해서 정족산성으로 간 이는 천총 양헌수였습니다.
신미양요에서는 진무사 정기원, 진무중군 어재연, 진무천총 김현경입니다. 진무사 겸 강화유수 정기원은 강화유수부에 있었고, 중군 어재연과 천총 김현경은 함께 광성보에 있다가 전투 중 함께 전사했습니다.
김현경(金鉉暻, 1811~1871)은 강화에서 태어나 1840년(헌종 6)에 무과에 급제했습니다. 어재연 장군이 오기 전부터 광성보를 수비하고 있었습니다. 6월 1일 벌어진 ‘손돌목 포격 사건’ 때는 당시 진무중군 이봉억과 함께 포격전을 지휘했습니다.
신미양요가 끝나자, 고종이 김현경에게 정려문을 내리고 공조참의로 추증했습니다. 광성보 쌍충비각에 모신 광성파수순절비는 김현경 등의 죽음을 기리며 세운 것입니다. 김현경 묘가 원래 송해면 하도리에 있었는데, 1983년에 강화읍 국화리로 옮겨 모셨습니다.
《승정원일기》에 이런 내용이 나와요. 경기감사 박영보가 고종에게 아뢴 말입니다. “광성(廣城)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것은 전적으로 진무중군(어재연)이 새로 부임하여 미처 두서를 분별하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물론 적절한 평가가 아닙니다. 그런데 박영보의 말을 통해 어재연이 광성보를 지키던 기간이 길지 않았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다시 날짜를 따져볼게요. 어재연이 광성보에 온 날이 6월 3일이고 전사한 날은 6월 11일입니다. 광성보에 머물던 기간은 열흘이 채 안 됩니다. 주변 지형지물을 제대로 숙지하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주변 상황을 잘 아는 부하 장수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듣고 수용해서 작전을 세우는 것이 좋았을 것도 같습니다. 《속수증보강도지》에 따르면, 김현경이 어재연 장군에게 진을 다른 곳으로 옮기자고 요청했습니다. 강화 지형에 익숙한 천총 김현경의 그때 나이 61세, 중군 어재연은 49세였습니다.
김현경은 어디로 진을 옮기자고 했을까요?
고립된 광성보 손돌목돈대는 위험하니 대모산으로 옮겨 가서 적을 맞자고 했습니다. 지금 덕진진 사거리 서쪽이 대모산입니다. 하지만, 어재연이 거부했습니다. 김현경이 하늘을 우러러 길게 탄식했습니다. 미군은 광성보로 진격하기 전에 대모산부터 장악했습니다. 만약, 어재연이 김현경의 뜻에 따라 광성보가 아니라 대모산에 진을 쳤다면 전투 양상이 달라졌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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