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한강의 끝을 보았는가?

                                                                   ▲ 황종섭
                                                                                      전. 한국 방송통신대학교 무역학과 강사

인류의 문명은 모두 큰 강변에서 시작되었다.
이집트의 나일(Nile)문명이 그렇고, 메소포타미아 문명, 인더스 문명과 중국의 황화(黃河)문명이 그렇다.
우리에겐 한강이 있다.
흔히들 우리가 일군 경제적기적을 일컬을 때 "한강의 기적"이라 한다.  그 강가에 우리 백성(百姓) 2500
여만명이 옹기종기 모여 그 물을 먹고 산다. 그 강위에 서른개가 넘는 다리가 있고, 그 위를 자동차로, 버스로, 전철로 매일 수만, 수십만명이 지나다닌다.
그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한강의 끝이 어디쯤일까 하는 의문을 가져 봤을까 ? 한강을 본 사람은 많아도 한강의 끝을 본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한강 본류의 길이는 발원지 태백산 검룡소에서 경기도 김포시 월곶면의 유도(留島)까지 494.4km이다.
한강은 북한강과 남한강에서 각각 발원하여 흐르다 경기도 양주군 양수리(두물머리)서 합류하여 수도 서울을 동서로 가로 질러흐르다 경기도 파주군 탄현면(일산 신도시 앞)에서 다시 임진강과 합수(合水)하여 강화도 동북단 연미정(燕尾亭)앞에서 한쪽은 강화만으로, 또 한쪽은 염하강으로 접어들어 강으로서의 그 생명을 다한다.

한강은 고려시대부터 이조에 이르기까지 세곡(稅穀)과 서해안에서 나는 소금, 해산물,특산물을 한양으로 운송하는 운송중심로였다. 삼남지방(경상도,충청도,전라도)에서 거둔 세곡을 (세금을 현물인 곡식으로 거둠)한양의 광흥창(廣興倉)으로 옮기기 위해 세곡선(稅穀船:조운선이라 함)을 이용하여 서해안과 강화만을 거처 한강으로 올라갔다.
강화만은 세계적으로 조수간만의 차이가 큰 곳으로 간만조 때 수심 차이가 무려 9미터나 된다. 그래서 한강을 오르내리는 모든 배는 유도(留島)라는 섬에서 물때를 기다렸다 만조가 되면 한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당시 유도는 사공들이 머물며 기다리던 곳으로 주막은 물론 기생집까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조시대에는 바닷배를 이용하여 뚝섬 나루까지 짐을 싣고 올라가 거기서 다시 강배(江船)로 갈아태워 원주와 충주까지 물길이 연결 돼 있었으나 강바닦이 모래로 쌓이면서 높아져 마포가 마지막 포구가 돼 한양에서 팔 새우젓을 내렸기에 지금까지 마포하면 새우젓을 연상하게 한다.
그외 노량진, 양화진 등도 모두 그 옛날 배들을 대던 나루터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이조시대에 강화도의 한강 입구는 사람의 인후(咽喉)만큼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다.
이순신 장군이 만일 명랑(鳴浪) 해전에서 패하여 왜구의 군함이 남해와 서해를 거처 강화만에서 한강을 타고 한양으로 진격할 기회가 주어졌다면, 한양을 방어할 겨를도 없이 왜구에 침략을 당했을 터이나, 다행이도 이순신 장군의 활약으로 남해를 거치지 못하여 육지로 진격을 했던 관계로 조선이 시간 벌어 명의 원군을 받을 기회를 얻었다.

한강이 바다로 접하며 그 생명을 다하는 바로 그 지점에 단 몇초라도 임종(臨終)을 늦추려는듯 유도(留島)가 버티고 서 물길을 막고있다. 그러나 그 섬위로 불행히도 남한과 북한을 경계 짓는 군사분계선이 지나고 있어 일반인의 접근이 금지된 채 수풀만 무성하다


한강 !
우리 민족의 젓줄, 수천 수만년을 그렇게 흘렀을, 그리고 그렇게 흐를 그 강을 지키는 수호신이 있다면 그에게 빌고싶다.

"우리가 이룬 현재의 기적보다 더 큰 미래의 기적을 이루게 해 달라고, 아울러 그 섬위로 지나는 선 없는
선도 함께 지워 달라고"...


참고: 연미정(燕尾亭)은 강화도 동북단에 위치해 있으며,그 지형이 제비 꼬리를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그곳에서 유도(留島)와 북쪽으로 황해남도 개풍군과 남쪽으로 김포시 월곶면을 동시에 볼 수 있으며, 한강이 바다로 접하는 한강의 끝을 조망할 수있다.

<저작권자 ⓒ 강화투데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최벽하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