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강화 충렬사를 알아봅시다

▲ 이경수
- 강화읍 출생, 거주
- 전)양곡고등학교 역사 교사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
1871년(고종 8), 흥선 대원군이 명령했습니다.
“영원히 높이 받들어야 할 47개 서원을 제외하고, 나머지 서원들은 모두 제사를 그만두게 하고 현판을 떼어내도록 하라.”
이게 바로 흥선 대원군의 업적 중 하나로 말해지는 ‘서원 철폐’입니다. 당시 전국에 있던 서원이 600여 개라고도 하고 1,000개가 넘었다고도 합니다. 정확히 몇 개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무튼, 엄청나게 많은 전국의 서원이 사라지고 딱 47개만 살아남았습니다.
서원은 기본적으로 교육기관입니다. 그런데 점점 조선사회의 암적인 존재가 되어 갔습니다. 교육 기능은 부실해지고, 정치 싸움의 지방 거점 역할을 하는가 하면, 힘없는 백성들의 토지를 빼앗아 재산을 늘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세금 납부는 회피해서 국가 재정을 어렵게 했습니다. 대개의 서원이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대원군이 거친 반대를 무릅쓰고 서원을 대거 없애버린 겁니다.
도산서원, 병산서원, 소수서원 등 살아남은 서원 47개의 명단이 《고종실록》에 실렸습니다. 그냥 한번 세어봤어요. 46개입니다. 눈이 침침해서 그런가 싶어서 다시 세어봤어요. 또 46개입니다. 그렇습니다. 실록 편찬자가 실수로 서원 한곳을 누락한 것입니다.
그런데요, 철폐되지 않은 서원 명단 중에 ‘강화 충렬사’(江華 忠烈祠)가 있습니다. 아니, 충렬사가 서원이란 말인가? 딱 꼬집어서 서원이라고 말하기는 거시기하지만, 서원과 유사한 역할을 수행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넓은 의미에서 보아 서원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겁니다. 아무튼, 단 47개 서원 속에 강화 충렬사가 있다는 것은 큰 의미를 갖습니다.

사람됨이 중후하고 근신했으며, 해야 할 일을 만나면 임금이 싫어해도 극언하였고, 항상 몸을 단속하여 물러날 것을 생각하며 한결같이 바른 지조를 지켰으니, 한 시대의 모범이 되기에 충분하였다. 그러다가 국가가 위망에 처하자 먼저 의리를 위하여 목숨을 바쳤으므로 강도의 인사들이 그(김상용)의 충렬에 감복하여 사우를 세워 제사 지냈다. 《인조실록》

강화 사람들이 병자호란 때 순절한 선원 김상용을 위해 사우를 세워 제사 지냈다고 했습니다. 그 사우(祠宇)가 바로 충렬사입니다. 사우는 서원과 성격이 비슷합니다. 사우를 서원보다 격이 약간 낮은 것으로 보기도 했습니다만, 조선 후기에 이르면 서원과 사우를 구분하기 어려워집니다. 당시 사회에서 그게 그거로 인식됐습니다.
사우 중에 순수한 사당 기능만 한 곳이 있고, 서원처럼 교육 기능을 병행한 곳도 있습니다. 강화 충렬사는 제사와 교육을 함께 행했습니다. 동재·서재 등 교육 시설이 갖춰져 있었습니다. 등록 학생수가 90명일 때가 있었고, 200명일 때도 있었습니다.


▲ 강화 충렬사

현렬사에서 충렬사로
그러면 충렬사를 창건한 것은 언제일까요?
당연히 병자호란 이후겠지요. 1642년(인조 20)에 세웠는데 처음 이름은 현렬사인 것 같습니다. 강화의 읍지들에 충렬사의 원래 이름이 두 개 나와요. 현충사(顯忠祠)와 현렬사(顯烈祠)입니다. 그래서 지금, 어디서는 현충사라고 설명하고 어디서는 현렬사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충렬사 건립 당시 인물인 이식의 글 중에 ‘강화 현렬사 상량문’(江華顯烈祠上梁文), ‘강도 현렬사 춘추양정축문’(江都顯烈祠春秋兩丁祝文)이 있습니다. 따라서 충렬사의 본디 이름을 현렬사로 보는 것이 적절할 것입니다.
현렬사를 충렬사로 이름 바꾼 이유는 무얼까요?
사액(賜額)됐기 때문입니다. 1658년(효종 9)에 사액되면서 현렬사가 충렬사(忠烈祠)가 되었습니다. 사(賜)는 임금이 하사, 즉 내려준다는 뜻이고 액(額)은 액자, 현판 같은 걸 말합니다. 서원(사우) 이름을 쓴 현판을 나라에서 내려주는 것이 ‘사액’입니다.
사액서원(사우)이 됐다는 것은 나라에서 공인했다는 의미입니다. 사액되면 나라에서 노비와 책 등을 내려줍니다. 땅을 주기도 하고 서원 소유 토지의 세금을 면제해 주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사액서원은 일반 서원보다 사회적 지위가 높고 경제적으로도 더 여유로울 수 있는 겁니다. 모든 서원과 사우가 사액 받기를 원했겠지만, 실제 사액되는 경우는 일부였습니다.
나라에서 현렬사에 내려준 현판에 ‘忠烈祠’라고 쓰여 있으니, 현렬사가 자연스럽게 충렬사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요, ‘충렬사’가 강화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산, 통영, 남해 등 전국 여러 곳에도 있습니다. 충무공 이순신을 비롯해 임진왜란기의 인물을 주로 모십니다. 그래서 ‘강화 충렬사’로 부르는 게 일반적입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은 풍기(지금 경북 영주)에 건립된 백운동서원입니다. 1543년(중종 38)에 풍기군수 주세붕이 세웠습니다. 그곳 출신인 안향을 모셨습니다. 얼마 뒤 풍기군수로 부임한 이황이 임금에게 사액을 요청했습니다. 1550년(명종 5)에 백운동서원은 紹修書院(소수서원)이라고 쓴 현판을 임금에게서 받았습니다. 사액서원이 된 것입니다. 이제 백운동서원의 이름이 소수서원으로 바뀝니다.
강화 충렬사에 김상용(金尙容, 1561~1637) 한 분만 모신 게 아닙니다. 창건 당시 김상용 등 7명을 모셨는데 이후 배향 인물이 점점 늘어나, 지금 29명이 되었습니다. 

김상용, 이상길, 심현, 이시직, 윤계, 송시영, 구원일, 황선신, 윤전, 권순장, 김익겸, 홍명형, 강흥업, 이돈오, 홍익한, 황일호, 윤집, 민성, 김수남, 이돈서, 안몽상, 전기업, 이삼, 김득남, 강위빙, 황대곤, 차명세, 어재연, 어재순

병자호란과 관련하여 순절하거나 전사한 분들입니다. 강화에서 생을 마감했거나, 아니면 강화와 연고가 있는 이들입니다. 그런데 맨 마지막 두 분은? 어재연·어재순 형제입니다. 신미양요 때 전사한 인물들이죠. 현대 시대인 1975년부터 어재연과 어재순을 충렬사에 모시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현재 충렬사는 병자호란과 신미양요 관련 인물을 함께 모시고 있는 것입니다.
어재연·어재순 배향을 좋게 해석하면, 충렬사의 역사상이 다양해진 것이고요, 좀 안 좋게 보면 충렬사 고유의 정체성이 흐려진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분명한 것은 병자호란이든, 신미양요든, 지금의 우리에게 삶의 지표가 되는, 고마운 선조들을 모신 곳이 바로 충렬사라는 점입니다.
입으로는 의(義)를 외치며 몸은 이(利)를 따르는 세태 속에서, 하나뿐인 목숨까지 내놓으며 지조를 지켜낸 이들의 정신은 민주 세상에서도 여전히 소중합니다.


▲ 충렬사 비

충렬사 산책
자, 가봅시다. 선원면 선행리 충렬사입니다. 충렬사 자리가 선원 김상용의 집터라는 기록도 있고, 김상용의 집터 근처라는 기록도 있습니다. 규모는 크지 않습니다. 아담합니다. 하지만 뭔가 기품이 배어있는 모습입니다. 깔끔하게 정비한 주차장 옆으로 화장실도 새로 설치했습니다.
동쪽으로 선 외삼문은 잠겨 있습니다. 남쪽으로 낸 쪽문으로 들어갑니다. 들어가자마자 비각이 우뚝! 1701년(숙종 27)에 세운 ‘강화 충렬사 비’입니다. 읍내 용흥궁공원에 있는 김상용 순의비를 세운 게 1700년(숙종 26)이니까, 거의 비슷한 시기에 건립한 것입니다.
병자호란의 경과와 김상용, 이상길, 심현 등 순절한 인물 그리고 ‘삼충신’으로 불리는 황선신·강흥업·구원일의 행적을 새겼습니다. “종묘사직과 원손이 여기에 있으니, 이곳은 나의 죽을 땅이다.” 김상용이 이렇게 말하고 자폭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충렬사 비문에 이런 내용도 있어요.

사대부들이 평소에는 도리를 말하여 참으로 사생(死生)과 의리를 구분할 줄 아는 것 같다가도 하루아침에 큰 난리를 만나면, 나라를 배반하고 살길을 엿보며 몸을 욕되게 하고 이름을 망하게 하지 않을 수 있는 이는 극히 드물다.


▲ 충렬사 사당

곱씹게 됩니다. 현대 시대에 적절히 대입해 봐도 될 듯합니다. ‘사대부’라는 주어를 다른 것으로 바꿔보면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해질 것 같습니다.
비각 안쪽으로 마당이고, 마당 양 끝으로 정갈한 건물 두 채가 마주 보고 있습니다. 수직방과 전사청이라고 하네요. ‘수직방·전사청’ 부분은 다음 호에서 조금 더 살펴볼 예정입니다.
툇마루에 잠시 앉았다가 내삼문으로 들어갑니다. ‘忠烈祠’라는 현판 걸린 사당입니다. 정면 3칸의 단아한 건물입니다. 사당 안 중앙에 김상용 선생의 위패를 모셨고, 좌우로 각각 열넷, 그래서 모두 스물아홉 분의 위패를 모셨습니다. 묵례하고 나오며 김연광이라는 이를 떠올립니다.
김연광, 그는 강화 양도에 살던 가난한 대장장이였습니다. 1876년(고종 13) 충렬사 중수 때 건물에 들어가는 각종 쇠붙이를 만들었습니다. 일이 끝나서 품삯을 주려는데 받지 않았습니다. 받으라, 받으라 강권해도 끝내 받지 않았습니다.


김연광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충렬사 일에 어찌 품삯을 받겠습니까.” 내삼문 쇠문고리를 만지작만지작해 봅니다. 이걸 김연광이 만든 것은 아니겠지만, 쇠문고리를 통해 그를 그려봅니다.
이제 여담 하나 덧붙이며 마무리하렵니다.


▲ 김상용 초상화(출처 중앙일보)

선원 김상용은 추앙받아 마땅한 역사 인물입니다. 하지만 그분의 순절 ‘방법’이 옳았는가는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병자호란, 강화성이 청군에게 함락될 무렵, 김상용은 남문루에 있었습니다. 화약을 터트려 자폭했습니다. 물론 선생 나름의 당위성이 있어서였겠으나, 저는 적절하지 않았다고 여깁니다.


그때 강화에서 순절한 이들 대개 조용히 목을 맸습니다. 그런데 김상용 선생은 강화성 방어의 핵심 구역인 남문루에서 화약에 불을 붙였습니다. 결과적으로 남문루를 폭파한 셈입니다. 더구나 화약은 총과 포를 쏘는 데 사용할 귀한 무기입니다. 그걸 없애버렸습니다. 화약이 폭발하고 건물이 무너지는 바람에 남문 주위에 있던 백성들 여럿이 죽거나 다쳤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잘한 것 같지 않습니다.


여러분 생각은 어떠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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