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강화에서 보는 병자호란

▲ 이경수
      -  강화읍 출생, 거주
      -  전)양곡고등학교 역사 교사



선원면과 선원 김상용
병자호란 때 선원 김상용 선생이 남문루에서 화약을 터트려 자결했습니다. 그의 호 ‘선원’은 강화군 선원면의 그 ‘선원’입니다. 어느 선원이 먼저일까요? 선원 김상용이 살던 마을이라서 그곳을 선원면으로 부르게 된 것일까요, 아니면 김상용이 선원면에 살게 되면서 자신의 호로 그곳 지명을 따서 선원이라고 한 것일까요?


선원면이 먼저입니다. 고려 대몽항쟁기에 세운 대사찰 선원사(禪源寺)가 있었습니다. 조선시대에 선원사가 있던 지역을 한자 살짝 바꿔 선원(仙源)으로 부르게 된 것 같습니다. 임진왜란 때 김상용이 선원에 와서 살았습니다. 이후 김상용은 자신이 머물던 마을 지명, 선원(仙源)을 자신의 호로 삼았습니다.


▲ 선원김선생순의비각

강화읍 용흥궁공원에 선원선생순의비(仙源先生殉義碑) 두 기를 모신 비각이 있습니다. 여기에 왜 비각이 있는가? 어릴 때 이렇게 들었습니다. 지금의 강화산성 남문루에서 김상용 선생이 불붙인 화약이 폭발하면서 선생의 신발 한 짝이 날라와 지금의 비각 자리에 떨어졌다! 신발 떨어진 자리에 비를 세운 것이다! 신기하고 재밌어서 아직도 기억합니다.


최근에 어느 선배님이 신발 한 짝이 떨어진 자리에 충렬사를 세웠다는 이야기도 있다고 알려주셨습니다. 그러니까 김상용 선생이 순절할 때 신발 한 짝은 선원면 충렬사 자리에, 또 한 짝은 강화읍 순의비각 자리에 떨어졌다는 얘기입니다.


사실이 아닙니다. 병자호란 당시 지금의 강화산성은 없었습니다. 강화산성은 병자호란 끝나고 70여 년 뒤인 1711년(숙종 37)에 쌓은 것입니다. 김상용 순절 당시에는 고려궁지에서 용흥궁공원 영역 정도의 작은 부성(府城)이 있었습니다. 그 성의 남문이 지금 김상용 순의비각 자리쯤에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김상용 선생이 순절한 자리에 비각을 세운 것입니다.


▲ 충렬사

얼마 전, 충렬사가 멀리 보이는 식당에서 고등학교 동창과 점심을 먹었습니다. 친구가 충렬사를 가리키며 저게 뭐냐고 묻더군요. 제가 충렬사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친구 왈, “여기도 절이 있구나.” 모처럼 친구놈과 둘이 낄낄 웃었습니다.


▲ 김상용 선생 묘(경기 남양주)

충렬사(忠烈祠)는 김상용 등 병자호란 때 순절한 인물과 청군에 맞서다 죽임을 당한 인물을 모신 사우(祠宇, 사당)입니다. 1642년(인조 20)에 세웠는데 처음 이름은 현렬사(顯烈祠)였어요. 서원과 유사한 기능을 수행했습니다. 1871년(고종 8) 3월, 흥선대원군이 전국 수많은 서원을 철폐하고 딱 47개만 남겼습니다. 그 47개 서원 명단 안에 강화 충렬사도 있습니다.


만약 충렬사가 다른 지역에 있었다면, 아주 유명한 문화유산 대우를 받았을 겁니다. 찾는 이들도 많았을 겁니다. 강화에는 전국에서 드물게 선사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화유산이 있습니다. 워낙 많습니다. 그렇다 보니 충렬사가 주목받지 못합니다. 충렬사를 절 이름으로 여기기도 합니다. 적어도 강화 주민들에게만큼은 선원면 충렬사가 널리 알려지고 방문객도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김경징과 삼충신

임진왜란을 치르고 약 30년이 지났을 때인 1627년(인조 5) 1월, 조선은 다시금 전쟁의 소용돌이로 빠져들었죠. 여진족이 세운 나라, 후금이 쳐들어온 정묘호란이었습니다. 임금과 조정은 강화도로 피해 와서 위기를 넘겼습니다.


정묘호란 끝나고 10년쯤 흐른 뒤인 1636년(인조 14), 후금의 홍타이지는 내몽골지역까지 차지하고 ‘몽골의 대칸’으로 인정받게 됩니다. 이에 고무된 홍타이지는 4월에 나라 이름을 후금에서 청(淸)으로 바꾸고 황제가 됩니다. 그가 청 태종입니다. 같은 해 12월, 추운 겨울날에 청군이 조선으로 쳐들어옵니다. 병자호란의 시작입니다.


고려 때 몽골군은 주로 겨울에 쳐들어왔습니다. 정묘호란도 겨울에 일어났습니다. 병자호란도 겨울입니다. 겨울엔 강이 얼어서 말 탄 채로 강을 건널 수 있습니다. 기동력을 살릴 수 있는 계절이 겨울입니다.


조선 국경을 넘은 청군은 불과 며칠 만에 서울 근처까지 왔습니다. 산성 전투를 의도적으로 피해 가며 신속하게 남쪽으로 내려온 결과입니다. 그들은, 인조가 정묘호란 때처럼 강화도로 들어가리라, 여겼습니다. 그래서 날랜 병사들을 뽑아 보내 인조가 강화도로 들어가지 못하게 막은 겁니다.


임금보다 먼저 출발했던 원손과 세자빈, 봉림대군 그리고 김상용 등 노약한 신하들은 무사히 강화에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임금 인조는 강화로 오는 걸 포기하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가야 했습니다.


해가 바뀐, 정축년(1637) 1월 22일, 배를 확보한 청군은 홍이포를 쏘아대며 강화해협을 건너 갑곶에 상륙합니다. 그리고 강화도를 장악합니다. 1월 30일, 남한산성에서 버티던 인조는 성을 나와 삼전도에서 항복의 의식을 치릅니다.


▲ 황선신 사당

정묘호란 때는 후금과 조선이 형제관계를 맺었지만, 이제 양국은 군신관계(君臣關係)를 맺습니다. 청나라의 신하국이 된 조선은 명나라와의 관계를 공식적으로 끊었습니다. 패배의 결과입니다.


청군이 강화도로 들이닥칠 때, 그들을 막아야 할 책임자는 검찰사 김경징과 강화유수 장신이었습니다. 하지만 김경징과 장신은 싸워보지도 않고 달아났습니다. 대장들 달아났어도 목숨 바쳐 싸운 이들이 있었습니다. 황선신과 강흥업 등입니다. 구원일은 싸움을 피하는 유수 장신을 꾸짖고 자결했습니다.


▲ 삼충사적비

갑곶돈대 마당에 삼충사적비(三忠事蹟碑, 1733)가 있습니다. 비문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오호라. 이 갑곶나루터 진해루 아래는 곧 삼충신이 죽음을 보이고 돌아간 곳이다. 죽은 날은 실로 정축년(1637) 정월 22일이었다. 슬프도다. 삼충신은 강화부 사람이었다. 중군 황선신은 분개하여 싸우다가 전사하였고, 우부천총 구원일은 칼을 쥐고 물로 뛰어들어 전사했으며, 좌부천총 강흥업은 중군과 함께 전사하였으니, 이른바 삼충이라 한다.…”


삼충사적비 앞에 서면 아립니다. 이 귀한 비석에 언제 누가 그랬는지 모르겠는데요, 쇠못 두 개를 깊게 박았습니다. 비석 부서질 위험 때문에 함부로 뺄 수도 없다고 합니다.

남자와 여자
청군이 장악한 강화도는 생지옥이 되었습니다. 청군은 닥치는대로 빼앗고 불지르고 겁탈하고 죽이고 또 잡아갔습니다. “다니는 길마다 눈 속에 버려진 어린아이들이 가득했으며, 죽은 아이는 서로 베고 누워 있고, 산 아이는 기어다니며 혹은 죽은 어미의 젖을 빨기도 하고, 혹은 어미를 부르고 할아버지를 부르며 구르다 다시 쓰러지니”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지경이었습니다.


청군의 손길이 닿기 전에 자결한 이들도 아주 많았습니다. 김경징의 어머니와 아내도 목숨을 버렸습니다. 송해수라는 이가 있습니다. 병자호란 그때, 강화성에서 자결했습니다. “내가 비록 천인이기는 하나 견양(犬羊, 청군)에게는 무릎을 꿇을 수 없다.”하고 목을 맸습니다. 천인? 그렇습니다. 송해수는 어느 집 노비였습니다. 노비 가운데 이렇게 목숨 버린 이들이 여럿입니다.


노비로 태어나 권리 없는 의무만 가득 지고 살아가던 이들의 순절의 의미, 곱씹어보게 됩니다. 김상용들에게 조선이 지켜야 할 나라였고 자존심이었듯, 노비에게도 조선은 지켜야 할 우리나라였고 자존심이었던 것 같습니다.


구창구라는 이름을 가진 강화 사람이 있었습니다. 병이 깊어 전신불수,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청군이 들이닥쳤습니다. 구창구의 아내 김씨는 멀리 피난 갈 수 없자 집안에 굴을 파고 남편을 옮겨 함께 숨었습니다. 그러나 발각되고 말았어요.


청군이 구창구를 죽이려고 합니다. 아내 김씨는 남편만은 살려달라고 빌고 또 빕니다. 청군은 남편을 살려두고 대신 김씨를 끌어갑니다. 순순히 잡혀가던 아내 김씨는 집이 한참 멀어지자, 청군을 욕하여 꾸짖더니 어느 다리에선가 투신해서 목숨을 버렸습니다. 남편 목숨 구해놓고 그렇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수많은 여인이 청군에게 끌려갔습니다. 남자들이 잘못해서 침략받고, 여인들이 그 피해를 몇 곱으로 받는 고통이 역사에서 반복됐습니다. 일본군 '위안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수없이 읽고 듣지만, 저는 여전히 ‘위안부’라는 용어가 불편합니다. 국어사전은 ‘위안(慰安)’을 ‘위로하여 마음을 편하게 함’이라고 설명합니다.


청나라에 끌려갔던 여인들이 몇 년 후 돌아왔을 때 남편들은 그녀들을 야멸차게 버렸습니다. 임금 인조가, 그러지 말라고, 여인들이 정절을 버린 것이 아니니 받아들이라고 했으나 남편들은 왕명도 듣지 않았습니다. 청나라에서 돌아온 여인들을 환향녀(還鄕女)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환향녀’에서 ‘화냥×’이라는 몹쓸 욕이 나왔다는 설이 있습니다.
다음 사료는 사관이 《인조실록》에 기록한 것입니다. 아마도 당시 남자들도 대개 이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사신(史臣)은 논한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으니, … 사로잡혀 갔던 부녀들은, 비록 그녀들의 본심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변을 만나 죽지 않았으니, 절의를 잃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미 절개를 잃었으면 남편의 집과는 의리가 끊어진 것이니, 억지로 다시 합하게 해서 사대부의 가풍을 더럽힐 수는 절대로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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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벽하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