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 도성 서북쪽 안현(지금 서울 무악재). 피와 살이 튀는 살벌한 전투! 도성을 지키려는 자와 빼앗으려는 자. 쉬 승부를 예단할 수 없는 격전. 때는 1624년(인조 2) 2월 11일. 드디어 결판이 났다. 도성을 지키려던 이가 졌다. ‘도성을 지키려던 이’는 누구인가?
이괄입니다. 평안도 영변에서 반란을 일으켜 남쪽으로 쳐 내려와 한양 도성까지 장악했던 이괄입니다. 인조는 반란군에게 궁궐을 내주고 저 멀리 충청도 공주로 달아났습니다. 기세등등했던 반란군은 장만이 지휘하는 관군에게 진압됩니다.
이괄의 난이 진압되고 3년 뒤, 1627년(인조 5)에 정묘호란이 터져요. 후금의 조선 침공입니다. 조선의 방어선이 거듭 뚫렸고 인조 조정은 강화로 피란했습니다. 후금군을 제대로 막아내지 못한 것은 조선 군사력이 약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된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괄의 반란입니다.
이괄은 후금군의 침략에 대비해서 조선 최정예군 1만 명 정도를 이끌고 영변에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유능한 지휘관들도 거의 영변에 있었습니다. 그랬는데 그들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군에게 거의 죽임을 당했습니다. 반란군을 진압하던 관군도 상당수가 죽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조선의 군사력이 꺾였습니다. 반란군의 일부는 후금으로 달아났다가 정묘호란 때 후금군의 길잡이가 되어 조선으로 옵니다.
그래도 외침을 막을 최소한의 병력은 있지 않았나? 있었습니다만, 제대로 싸울 수 있는 능력이 부족했습니다. 언제 후금군이 쳐들어올지 모르는 비상 상황이지만, 군사 훈련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에요. 이괄의 반란으로 식겁했던 조정은 역모에 대한 감시를 전방위적으로 확대했습니다. ‘공안정국’이 조성되고 말았습니다. 특히 장수들이 감시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훈련하려고 하면, ‘저놈이 반란하려고 군사를 움직이나?’ 의심받아야 했습니다. ‘정권 안보’를 위해 ‘국가 안보’를 무너트리고 있던 겁니다.
남이흥은 평안도 안주성에서 여러 차례 후금군을 격퇴하면서 적에게 심각한 타격을 입혔습니다만, 결국에는 성을 빼앗기고 자결합니다. 그때 남이홍이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조정에서 내가 마음대로 군사를 훈련하고 기를 수 없게 했는데, 강한 적을 대적하게 되었으니 죽는 것은 내 직책이나, 다만 그것이 한이로다.”
후금군이 조선 영토로 짓쳐들어온 것은 1627년(인조 5) 1월 13일. 인조가 강화에 들어온 것은 1월 29일입니다. 그 며칠 전에 인조는 강화부성 안에 유배돼 있던 광해군을 교동으로 옮기게 했습니다. 좁은 성안에 자기가 폐위시킨 광해군이랑 같이 있기가 불편했던 모양입니다.
전쟁 초반, 뜻밖에 후금군이 먼저 화친을 요구해 옵니다. 명과 맞서고 있던 후금은 조선과 장기전을 치를 여건이 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당시에는 후금군이 강화도를 공격할 능력도 없었습니다. 반대하는 신하들이 있었지만, 아무튼 인조 조정은 후금과 대화에 나섭니다. 후금의 사신이 강화를 드나들었습니다. 연미정 등에서 양국의 교섭이 진행됐습니다. 물론 뭍에서는 전투가 계속되고 있었고요.
후금은 화친 조건으로 크게 두 가지를 요구했습니다.
①조선은 명나라와 절교하라!
②후금이 형이 되고 조선이 아우가 되는 형제관계를 맺자!
조선은 명나라 섬기는 일만큼은 절대 그만둘 수 없다며 버팁니다. 후금은 이런저런 협박을 가하며 조선을 압박합니다. 하지만, 시간은 조선 편이었지요. 후금이 물러서면서 양국은 화친조약을 맺게 됩니다. 후금은 조선과 명의 관계를 그대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후금이 형 나라가 되고 조선이 아우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조선과 후금 서로 절반의 성공을 거둔 셈입니다.
후금의 요구에 따라 양국 간에 맹세 의식을 치르기로 합니다. 1627년(인조 5) 3월 3일, 드디어 조선과 후금은 맹약을 통해 화친조약을 맺었습니다. 조약 맺은 장소는 어디일까요?
연미정이라고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연미정은 후금 사신을 맞이하고 접대하고 또 교섭하던 곳이지 조약 체결 장소는 아닙니다. 그럼 어디서? 지금의 고려궁지 자리쯤에 있었을 강화도호부와 그 주변에서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맹약을 통해 최종 조약을 맺는 1627년(인조 5) 3월 3일의 실록 기록을 봅니다.
이날 밤 상이 대청에 나가 향을 피우고 하늘에 고하는 예를 몸소 행하였다. … 좌부승지 이명한이 맹세문을 읽었다. … 예를 마치고 상은 환궁하고 … 오윤겸·김류·이귀 … 등이 유해(후금 사신)와 함께 서단(誓壇)에 이르렀다. 호인들이 소와 말을 잡아 혈골(血骨)을 그릇에 담았다. 이행원이 맹세문을 낭독하였다. … 남목태(후금 사신) 등도 맹세하기를, … 하였다. 맹세하는 절차를 마치자, … 접대하는 재신들이 유해를 성 밖에서 전송하였다.
이날 맹약은 1부와 2부로 나누어 진행된 셈입니다. 1부에는 인조가 강화도호부 대청에서 향만 올리고 행궁으로 돌아갔습니다. 2부는 양국 대표들이 서단으로 이동해서 소와 말을 잡고 서로 맹세문을 읽는 것으로 마무리됐습니다.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맹세의 단, 서단(誓壇)은 서문밖[江都西門外]에 있었습니다.
이렇게 정묘호란이 끝났습니다. 육지 백성 처지는 참혹했으나, 강화 조정은 무탈했습니다. 1627년(인조 5) 1월 13일에 시작된 전쟁이 3월 3일에 끝난 셈이니, 전쟁 기간은 50일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요, 인조가 강화를 떠난 것은 화친조약 체결하고 한 달도 더 지난 4월 10일입니다. 후금군이 모두 물러갈 때까지 기다린 겁니다.
조정이 강화에 머무는 동안 강화 주민들 형편은 어땠을까요. 후금군 침공 지역에 살던 백성들만큼은 아니지만, 꽤나 고통스러웠습니다. 조정 신하들만 강화로 온 것이 아닙니다. 대규모 군사들이 강화로 들어왔고 신하들의 가족 등 피란민이 아주 많이 왔습니다.
강화 주민들은 군막 설치 등 각종 노역에 동원됐습니다. 너무 고되어서 집 버리고 멀리 달아나 버린 이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피란 온 양반집의 노비와 군인들이 빈집을 헐어 목재를 땔감으로 쓰는 일이 빈번하게 벌어졌습니다. 주민들의 원성이 자자했을 겁니다.
민심을 달래야 했습니다. 인조는 신하들의 요청을 수용해서 강화 주민의 세금을 면제해주고 빚도 탕감해줍니다. 그리고 도호부성 밖으로 나가 강화 주민들을 직접 만나 그들의 고충을 듣고 위로했습니다. 아울러 양반들을 위한 위안책도 펼치니, 바로 과거 시행입니다.
1627년(인조 5) 2월 17일 강화도 조정. 특별 과거를 시행하자는 의논이 있었습니다. 임금을 호위해 온 외지 유생들에게도 응시 기회를 주자는 예조의 건의가 있었으나 인조는 이렇게 지시합니다. “호종한 유생은 응시하도록 허락하지 말고 통진·교동 등지의 고을 사람들은 응시하도록 허락하라.”
강화 본섬과 교동도 그리고 통진 주민만 응시할 수 있는 특별 과거를 베풀라고 했습니다.(지금의 김포시 월곶면, 하성면, 대곶면, 통진읍, 양촌읍 지역이 조선시대 통진입니다.) 이에 따라 강화에서 과거가 열린 것은 화친조약 체결 이후인 3월 11일입니다. 이때 최종 급제자 4명 가운데 정유성(1596~1664)과 윤계(1603~1636)가 있습니다.
정유성과 윤계는 황치경(1554~1627)의 외손자입니다. 호조참의, 공조참의, 전라감사 등을 지낸 황치경은 삼포왜란(1510)을 진압한 황형의 후손으로 당시 강화를 대표하는 인물이었습니다. 황치경은 사위 정근이 사망하자 어린 정유성을 강화 집에 데려다 키우고 가르쳤습니다. 정유성은 나중에 우의정까지 지내게 됩니다. 정유성의 손자가 바로 조선 양명학 즉 강화학을 일으킨 하곡 정제두입니다.
황치경은 또 사위 윤현갑이 사망하자 딸과 외손자들을 강화 집에 와서 살게 했습니다. 그래서 윤계는 동생 윤집과 함께 강화 외가에서 컸습니다. 윤계는 병자호란 때 지방 수령으로 있다가 청군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윤계가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이러했습니다.
오랑캐(청군)가 붙잡아서 무릎을 꿇으라고 협박하자 공(윤계)이 꾸짖으면서 “목을 자를 수는 있어도 무릎을 꿇을 수는 없다.”라고 말하였다. 또 회유하여 데리고 가려고 하자 다시 꾸짖어 말하기를 “죽어도 너희들을 따르지 않겠다. 빨리 나를 죽여라.”라고 하였다. 오랑캐가 더욱 화가 나서 병장기로 마구 내리쳐서 몸에 온전한 곳이 없었다. 공이 죽음에 임해서도 입으로 꾸짖기를 그치지 않자 오랑캐가 다시 뺨을 도려내고 혀를 잘랐다.
홍익한·오달제와 함께 삼학사로 불리는 윤집은 청나라로 끌려가 목숨을 잃게 됩니다. 윤계와 윤집 형제는 강화 충렬사에 모셔졌습니다.
한편, 환궁한 뒤인 1627년(인조 5) 5월 11일에 인조가 심열을 강화유수로 삼습니다. 강화에 있던 4월 2일에 비변사에서 강화에 유수부를 설치하고 심열을 유수로 임명하자고 건의했었습니다. 그때 인조는 환도 후에 시행하자고 대답했습니다. 그 일을 마무리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강화도호부는 강화유수부로 불리게 됩니다.
후금에게 정묘호란은 ‘절반의 성공’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절반의 실패’이기도 합니다. 애초 그들의 중요 목적은 조선과 명의 관계를 끊는 데 있었는데 그걸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다시 오게 될 겁니다. 정묘호란 끝나고 대략 10년 뒤, 후금은 나라 이름을 청으로 바꾸고 다시 옵니다. 병자호란(1636)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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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벽하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