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경수
- 강화읍 출생, 거주
- 전)양곡고등학교 역사 교사
운양호·운요호
프랑스와 미국에 이어 이번에는 일본의 침략입니다. 다시 또 강화도입니다. 신미양요 4년 뒤 1875년(고종 12) 9월, 초지진 앞바다에 일본 군함 운요호가 나타납니다. 쌍방 포격전 끝에 운요호가 퇴각합니다. 이를 ‘운요호 사건’이라고 불러요.
독자분들 대개가 학창시절에 운양호 사건(雲揚號事件)으로 배웠을 겁니다. 한자 그대로 읽은 거지요.
지금은 해당 나라 발음에 가깝게 읽는 원칙이 서서 운요호 사건이라고 합니다. 모택동을 마오쩌둥으로 쓰는 것처럼 말이죠.
그런데요, 일본 사람들이 전함(戰艦)을 ‘함’으로 부르고 수송선을 ‘호’라고 했대요. ‘운요호’보다는 ‘운요함’이 더 정확한 호칭인 셈입니다만, 이 글에서는 역사용어로 굳어진 ‘운요호’를 그대로 쓰겠습니다.
메이지유신
이제 운요호 사건이 일어나게 되는 배경을 알아보겠습니다.
조선시대에 일본은 막부(幕府, 바쿠후) 체제였습니다. 최고 권력자는 막부의 우두머리인 쇼군[將軍]입니다. 쇼군은 일본 땅을 여러 개의 번(藩)으로 나누고, 각 번을 다이묘[大名]라고 하는 영주에게 다스리게 했습니다. 일종의 봉건제였다고 할 수 있어요. 그들이 천황이라고 부르는 국왕이 있었지만, 국왕은 아무런 실권도 없었습니다.
마지막 막부가 에도막부입니다. 임진왜란 뒤에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가 에도(도쿄)에 연 무사정권입니다. 1854년, 에도막부는 미국의 함포 위협에 굴복해서 미·일 화친조약(1854)을 맺고 개항합니다.
1867년, 커다란 정치 변혁이 일어납니다. 막부가 무너지고 새로운 정부가 선 것이에요. 새 정부의 우두머리는 ‘천황’, 메이지[明治] ‘천황’입니다. 오랜 세월 이름뿐이었던 ‘천황’이 실제 권력을 되찾았습니다. 번은 폐지됐습니다. 일본은 ‘천황’ 중심의 중앙집권체제로 탈바꿈하며 근대화를 추진합니다. 이를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이라고 하지요.
서계 갈등
메이지 정부는 조선에 서계(書契, 외교문서)를 보내 자기 나라의 정치 변동 사실을 알리고 조선과 새로운 외교 관계를 맺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조선은 일본이 보낸 서계 접수를 거부합니다. 보내고 거부하고 보내고 거부하면서 양국의 감정이 쌓여갑니다.
일본이 조선에 보내던 서계는 양식과 격식이 아주 엄격한 공문서입니다. 몇백 년간 그 원칙이 흐트러짐 없이 지켜졌습니다. 그랬는데 메이지 정부가 전통을 깡그리 무시한 양식의 서계를 보내온 것입니다.
특히 문제가 된 것은 일본 서계에 중국 황제만 쓸 수 있는 특정한 글자들이 들어가 있던 것입니다. 일본 국왕이 대외적으로도 황제임을 공식적으로 밝혀 강조하려는 의도입니다.
일본 국왕이 중국 황제와 동급이면, 조선은 졸지에 일본의 아래 나라가 되는 셈입니다. 조선이 서계를 받으면, 조선보다 일본이 상위 나라임을 인정하는 게 됩니다. 그래서 조선이 서계 접수를 거부했던 것입니다. 중국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도 서계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쇄국정책’을 강하게 펼치던 흥선대원군이 정권에서 밀려났습니다. 고종이 실권을 잡았습니다. 이때다, 싶은 일본이 운요호 등 군함을 조선으로 보냅니다. 곳곳에서 함포를 쏘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습니다. 조선 조정을 위협해서 서계를 접수하게 하고, 그래서 조선이 메이지 정부와 새로이 국교를 체결하게 하려는 술책이었습니다.
운요호는 일본이 영국에서 구입한 증기선입니다. 길이 약 38m 크기인 목조 포함(砲艦)으로 승선 정원은 70여 명입니다. 부산에서 동해안을 따라 올라가면서 수심을 측량하고 조선의 방어 상태 등도 살피고 일본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옵니다. 강화로.
일본군을 격퇴하다
1875년(고종 12) 9월 19일, 운요호가 인천 월미도 근처까지 와서 정박합니다. 9월 20일(음력 8월 21일), 소총 등으로 무장한 일본군 일부가 보트에 옮겨 타고 강화도 쪽으로 올라와 초지진 앞바다에 이르러 오락가락합니다. 작은 배로 온 것은 상륙하겠다는 의도입니다.
일방적인 침입에 맞서 초지진 수비군이 포격합니다. 조준 사격이 아니라 더는 가까이 오지 말라는 경고사격이었을 겁니다. 그러자 일본군이 초지진을 향해 총을 쏘아댑니다. 전투가 시작된 것입니다. 30분 정도 흐른 뒤 일본군은 강화도 상륙을 포기하고 운요호로 돌아갑니다.
다음날, 9월 21일 오전, 운요호가 직접 올라옵니다. 황산도를 지나와서 초지진 쪽으로 함포 사격을 시작합니다. 초지진 포대에서도 대응 사격을 하면서 쌍방 치열한 포격전이 벌어집니다. 대략 두 시간 정도였습니다.
운요호 함장 이노우에는 강화도에 상륙하지 못하는 건 국가의 치욕[國辱]이라며 군사들을 몰아붙였습니다. 하지만, 조선 수비군의 반격에 눌려 상륙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굳이 결과를 따지자면, 조선의 승리요, 일본의 패배인 것입니다.
신미양요 때 초지진 수비군은 미군의 함포 사격이 시작되자 바로 철수해버렸습니다. 하지만, 운요호 사건 때는 물러섬 없이 싸웠습니다.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적선이 물러갈 때까지 포를 쏘고 또 쐈습니다.
신미양요 겪은 뒤에 신헌 유수 주도로 설치한 포대가 큰 역할을 했습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당시에는 초지돈대(초지진) 바로 아래 바닷가 쪽으로도 포 구멍 여섯 개짜리 포대가 있었습니다. 포대에는 포탄의 크기를 키우고 사거리를 늘린 새로운 화포가 비치돼 있었습니다.
운요호에 타고 있던 스즈키라는 병사가 자기 동생에게 사건의 전개 과정을 적어 보냈습니다. 그가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 “20일…그 포대에서 우리 보트를 향해 갑자기 크고 작은 포를 난발했다. 따라서 우리는 각자 소총을 쥐고 여기에 응전하였으나 그 기세를 당해내기 어려웠다. 다행히도 본함까지 무사히 퇴각했다.”라고 적었습니다. 이어서 “21일…저들 역시 맹렬하게 크고 작은 대포를 난사했다. 우리 함선에서는 100근, 40근, 20근 등의 포탄을 발사했다. 하지만 적은 물러나지 않았다.”라고 했습니다.
영종성이 불타다
이노우에 함장, 큰소리 떵떵 치고 강화까지 왔는데, 자기 말대로 ‘국욕(國辱)’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자존심이 상합니다. 철수하기 전 황산도에 상륙해서 여기저기 부수고 불지르면서 화를 풉니다. 당시 황산도에는 조선 수비군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황산도를 떠난 운요호, 이번에는 영종도에 상륙합니다. 9월 22일입니다. 조선군과 전투 끝에 상륙에 성공한 일본군은 대포 36문을 포함한 무기들을 탈취해 갑니다. 본국에 돌아가서 어쨌든 조선군과 싸워서 승리했다고 보고하려면, 증거물품, 그러니까 ‘전리품’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영종성의 무기들을 쓸어간 겁니다. 일본군에 의해 영종성은 불탔고 많은 주민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식수 구하러 왔다고?
운요호 사건 자료를 검색해보면, 대개 중국 잉커우로 가던 운요호가 식수를 구하려고 강화 초지진 근처까지 오게 되었다고 나옵니다. 요동반도 바로 위에 있는 우장(牛莊)이 잉커우입니다.
싸우겠다고 온 게 아니라 물 좀 달라고 온 건데, 초지진의 조선 수비군들은 물 대신 포탄을 쏘았습니다. 인도적으로 볼 때, 조선이 잘못한 것 같다는 생각이 살짝 들려고도 합니다.
하지만, 조선은 잘못이 없습니다. 식수 얘기는 일본이 꾸며낸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물은 월미도에도 영종도에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거기서 구하면 되지 굳이 물살 사나운 강화까지 올라올 필요가 없는 겁니다.
꾸며낸 식수 얘기 때문에 조선은 인도주의도 모르는 야만적인 나라로 취급당하게 됩니다. 조선에 공격당한 일본 운요호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왜곡된 인식이 퍼졌습니다. 피해자는 조선이요, 가해자가 일본인데, 일본은 피해자가 됐고, 조선이 가해자가 됐습니다. 일본이 그렇게 대내외에 적극적으로 홍보했습니다.
진짜로 변신한 가짜
이노우에 함장이 운요호 사건 보고서를 자세히 써서 일본 정부에 제출했습니다. 일본 정부는 이노우에의 보고서를 검토한 뒤, 다시 쓰라고 명령합니다. 자기네에게 여러모로 불리한 내용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빼고, 이 말은 이렇게 바꾸고, 이 말을 새로 넣고, 이런 식으로 구체적으로 재작성 방법까지 알려줍니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그 일을 주도했습니다.
이노우에는 정부 명령에 따라 허위 보고서를 다시 만들어 올립니다. 일본 정부는 원 보고서를 감춰두고 새로 쓴 2차 보고서 그러니까 허위 보고서만 대내외에 공개하면서 역사를 왜곡했습니다.
2차 보고서에 물을 구하러 왔다는 얘기와, 일본 배에 일본 국기를 달고 있었다는 내용 등이 추가됐습니다. 이 말은 곧, 운요호가 식수 구하러 온 것이 아니며, 자기네 국기도 달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남의 나라 해안으로 무단 진입하는 것은 침략 행위입니다. 당시 국제법상으로도 엄연한 불법에 해당합니다. 다만 식수가 떨어졌다거나 하는 위급 상황 때 국기를 달아 국적을 밝히고 물을 구하러 들어가는 것은 예외로 인정됐습니다. 그래서 국기를 달았다는 내용을 추가한 것입니다.
그들이 꼭꼭 숨겨두었던 1차 보고서가 얼마 전에야 공개됐습니다. 뒤늦게 세상에 진실이 알려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요, 일본군이 강화의 초지진을 점령하고 각종 무기도 탈취해 갔다는, 설명이 널리 퍼져있습니다. 역사책이나 각종 신문, 방송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사실이 아니라는 걸 이제 아셨습니다. 일본군은 초지진에 한 발도 들여놓지 못했습니다. 강화에서 철수하던 일본군이 영종도에 상륙해 몹쓸 짓 한 것이 초지진에서 벌어진 일로 와전된 것 같습니다.
초지진 수비군의 공격을 처음 받았을 때 운요호 이노우에 함장 기분이 어땠을까요. 당황했을까요? 분노했을까요? 아닙니다. 음흉한 미소를 지었을 겁니다.
그는 강화도로 향하기 전에 주변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그들이(조선) 만일 발포한다면 다행이다.” 일본군 보트가 초지진 앞을 오가며 집적거리며 조선군의 포격을 유도했던 것입니다. 다만, 초지진 수비군의 방어능력을 과소평가한 잘못 때문에 상륙도 하지 못하고 물러가야 했던 것이지요.
운요호 사건이 벌어진 때가 1875년입니다. 새해가 2025년입니다. 300년 전 그날, 강화 초지진에서 벌어졌던 일본의 침략 행위를 되새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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