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병인양요, 하필 강화에서

                                                                      ▲ 이경수
                                                                                     - 강화읍 출생, 거주
                                                                                     - 전)양곡고등학교 역사 교사


서양에 맞서다
1863년, 고종의 시대가 시작됐습니다.
철종이 자식을 낳지 못하고 일찍 죽어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아들(고종)이 왕위를 이었다고 말해집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아요. 철종은 아들 다섯에 딸 여섯을 두었습니다.

▲ 병인양요 갑곶전투도(서울 전쟁기념관)

자식이 모두 11명입니다. 그런데 전부 어린 나이에 죽고 말아요. 그래서 고종이 즉위하게 된 것입니다.
즉위 당시 고종 나이가 12살. 너무 어려서 아버지 이하응이 사실상의 왕 역할을 하게 됩니다. 고종 3년 병인년, 1866년에 프랑스가 조선을 침공합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병인양요(丙寅洋擾)라고 부릅니다.
“뭘 찾아 먹겠다고 그 먼 프랑스에서 조선까지 쳐들어오고 그랬시꺄?”
프랑스군이 유럽 땅 프랑스에서 조선으로 온 게 아니고요, 가까운 중국에서 왔습니다. 중국에 프랑스 함대가 주둔하고 있던 겁니다. 중국 즉 청나라가 이미 개항한 상태라 그게 가능했습니다. 몇 년 뒤 신미양요 때 미군은, 미국이 아니라 일본에서 조선으로 옵니다. 그때 일본도 개항을 했거든요.


제국주의 시대
18세기 후반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시작됐습니다. 점차 다른 나라들로 확산합니다. 산업혁명을 단순하게 정의하면 ‘손에서 기계로’ 생산수단이 바뀐 겁니다. 생산량이 엄청나게 늘어납니다. 증기기관을 동력으로 이용하게 되면서 생산력이 더욱 증가합니다.
산업혁명을 이룬 서양 나라들은 자국에서 대량 생산된 물품을 팔고, 물품 만들 원료도 확보하기 위해서 그리고 잉여 자본을 투자해 더 큰 이익을 남기려고 해외로 나섭니다. 증기기관을 이용한 증기선이 있었기에 원거리 항해가 수월해졌습니다.
그들의 해외 진출은 폭력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여러 나라를 침략해 식민지로 삼은 것이지요. 19세기에 주로 벌어진 이들의 침략 행태를 역사에서 제국주의라고 부릅니다. 일본 역시 제국주의의 길로 나아갑니다. ‘일제강점기’, ‘일제시대’의 ‘일제’는 일본 제국주의라는 의미입니다.
인도는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고 베트남은 프랑스의 식민지가 됩니다.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필리핀은 미국의 식민지가 되고요.
아편전쟁에서 영국에 패한 청나라는 난징조약(1842)을 맺고 개항합니다. 청나라는 유럽 여러 나라에 영토의 상당 부분을 떼어주면서 반(半)식민지로 전락합니다.
제국주의 국가 프랑스가 조선을 노리고 쳐들어옵니다. 흥선대원군이 조선에 와 있던 프랑스 성직자 여러 명을 죽였습니다. 수많은 조선인 신자도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 끔찍한 사건을 병인박해라고 합니다. 이에 대한 보복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프랑스군이 하필이면, 강화도로 쳐들어옵니다.

강화, 점령당하다

담장처럼 늘어선 구경꾼들 몹시도 흥분하여
잇달아 몰려와 어깨 부대끼며 떠들썩하게 웃네
포가(砲架)가 움직일 땐 놀라 다시 흩어지니

……


당대 인물인 조면호의 〈서사잡절〉에 나오는 시의 일부입니다.
한강가에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나와 구경합니다. 흥분해서 웃고 떠들다가 놀라서 달아났다가 다시 모여 구경하는 어수룩한 백성들입니다.
뭘 보고 저런 걸까요? 바로 프랑스 군함입니다. 시커먼 연기 내뿜으며 물살을 거슬러 오르는 증기선이 무서우면서도 너무 신기한 겁니다. 난생처음 보는 모습입니다.
프랑스 군함이 한양 근처까지 닥치자, 조선군은 배를 일렬로 띄워 그들을 막으려 했습니다. 그러자 프랑스 군함이 함포를 쏩니다. 천둥소리 같은 포성에 구경꾼들 혼비백산 달아납니다. 삽시간에 소문이 퍼지고 놀란 도성 사람들 줄지어 피난을 나섭니다.
강화가 아니고 한양?
프랑스군이 강화로 쳐들어오기 전에 한양 근처까지 일종의 정찰을 나갔던 것입니다. 물길도 살피면서 말입니다. 그때가 1866년(고종 3) 양력 9월이었어요. 프랑스군은 별다른 침략 행위 없이 중국 산둥반도 즈푸항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10월, 그들이 다시 왔습니다. 7척 군함에 약 1,500명 병력인데 강화도로 닥친 것은 4척 군함에 900명 정도의 병력이었습니다. 큰 배로 염하를 통과하기 위험하다는 걸 알고, 상대적으로 작은 군함만 동원한 겁니다. 나머지 병력과 군함은 인천 앞바다에 대기.
갑곶에 상륙한 프랑스군이 강화유수부를 차지한 것은 10월 16일(음력 9월 8일)입니다. 병자호란 때인 1637년(인조 15)에 외적에게 함락됐던 강화도가 230년 만에 다시 외적에게 점령된 것입니다. 씁쓸합니다만, 갑곶에서도 강화산성에서도 전투다운 전투는 없었습니다. 프랑스군이 닥쳐오자, 강화유수부터 도망갔으니까요.


▲ 정족산성 남문

정족산성에 들기까지
프랑스군이 한양이 아닌 강화를 침공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자기네 병력 규모로 한양을 점령하는 것은 어렵다, 대신 강화를 차지하고 길목을 막으면 조선은 항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계산입니다.
한양 도성으로 가는 쌀, 소금, 땔감 등등. 대개 염하를 통해 한강으로 갑니다. 염하를 막고 있으면 못 갑니다. 그러면 한양 물가가 폭등하고 백성들의 불만이 터집니다. 전쟁에 대한 원초적 불안감은 말할 것도 없지요. 흥선대원군이 항복하고 개항하게 되리라는 게 프랑스군의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대원군은 개항할 뜻이 없습니다. 강화가 점령된 그날, 프랑스군 격퇴를 목표로 순무영이라는 부대를 설치하고 순무사에 이경하, 순무중군에 이용희, 순무천총에 양헌수(梁憲洙, 1816~1888)를 임명합니다.
10월 18일, 양헌수 부대가 김포 문수산 아래 통진도호부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11월 7일~11월 8일에 염하를 건너 정족산성으로 들어갑니다. 500여 명 규모입니다. 통진에 도착한 뒤 무려 스무날 만에 겨우 강화 땅에 들어온 것입니다.


▲ 양헌수 승전비각

왜 그랬을까요?
프랑스 함대가 염하를 오르락내리락 지키니 건널 수가 없던 겁니다. 그들은 염하뿐 아니라 북쪽 바다 타고 교동 지역으로도 오갔습니다. 해안에 있는 군사 시설과 창고를 불지르면서 말입니다.
결정적으로, 양헌수 부대를 강화로 태워다 줄 배가, 없었습니다. 저 위 한강에 넉넉하게 준비돼 있으나, 프랑스 군함이 막고 있어서 내려올 수 없었습니다. 통진 주민들이 배 5척을 어렵게 구해준 덕분에 염하를 건널 수 있었습니다. 칠흑 같은 밤에.
프랑스군이 강화를 점령하고 있는 동안, 주민들 삶은 무너져내렸습니다. 황해도 땅으로, 주변 섬으로, 그것도 어려우면 남쪽 마을로 피란 갔습니다. 피란 갔다가 죽기를 각오하고 돌아온 이들도 있었습니다. 봄부터 피땀으로 키운 벼, 추수하러 오는 겁니다.
프랑스군은 심심풀이하듯, 이집 저집 다니며 부수고, 훔치고, 빼앗고, 불 지르고, 떠나지 못한 사람들 죽이고, 겁탈하고, 그랬습니다. 외규장각 의궤와 각종 보물도 갑곶으로 옮겼습니다.
한편, 양헌수 부대가 정족산성에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갑곶에 있던 프랑스군이 정족산성으로 옵니다. 드디어 벌어지는 전투, 정족산성 전투, 11월 9일, 음력으로 10월 3일입니다.
무기 성능의 현격한 격차에도 불구하고 양헌수 부대가 프랑스군을 대파합니다. 읍내로 퇴각한 프랑스군은 서둘러 짐을 꾸립니다. 그 등등했던 기세는 이제 없습니다. 정족산성 전투 이틀 뒤인 11월 11일 새벽, 모든 병력이 갑곶에서 배를 타고 황망히 떠납니다. 그렇게 병인양요가 끝났습니다. 양헌수가 병인양요를 끝내버렸습니다.
양헌수 장군 동상이 정족산성 아래 길상초등학교 교정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언젠가 없어졌습니다. 아쉽습니다. 한국사는 물론이고 우리 강화의 역사에서도 양헌수 장군은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습니다. 하지만 그만큼의 존중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도 같습니다.
어재연 장군은 충렬사에 모시고, 별도의 사당 충장사를 건립하고, 광성보 입구에 멋진 동상도 세우고, 해마다 정성껏 제사도 올리고 그러는데 말이죠. 만약에 양헌수 장군이 이순신 장군처럼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마지막 순간에 전사했다면, 우리는 지금 그를 어떻게 대우하고 있을까, 생각해봅니다.


▲ 양헌수 초상[강화역사박물관]

신앙과 나라

프랑스 군함들은 조선 사람들도 겁내는 손돌목을 어떻게 통과했을까요? 염하 물길을 아는 조선인 몇이 그들의 배에 타고 안내했습니다. 천주교 신자였습니다. 정족산성에 양헌수 부대가 들어간 것을 프랑스군에게 바로 알린 것도 조선인 신자였습니다.
병인박해 때 대원군은 조선에 있던 프랑스 신부 12명 가운데 9명을 처형했습니다. 나머지 3명은 달아나 목숨을 구했어요. 리델, 페롱, 칼레 신부입니다. 이 가운데 리델 신부가 청나라로 피해 가서 그곳에 주둔한 프랑스극동함대사령관에게 보복을 요청합니다. 리델은 함께 갔던 조선인 신자들과 함께 프랑스 군함을 타고 다시 조선에 왔습니다.
리델과 비교되는 신부가 있어요. 병인박해 때 죽임을 당한 베르뇌 신부입니다. 누군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프랑스 황제에게 조선에서 신앙의 자유를 얻도록 힘써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 어떨까요?”
베르뇌 신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솔직히 말하지만, 나는 서양 군인들의 개입을 몹시 두려워합니다. 조선에서 우리는 오늘날까지 박해를 당하고 있지만, 우리는 거리낌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죽일 수는 있겠지만, 그러나 아무도 우리를 업신여길 권리는 없습니다. 그런데 군함들이 와서 처신을 잘못하면 그 스캔들은 박해보다도 천 배나 더 해로울 것입니다”


1997년, 양도면에 있는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단 이름으로 성명서가 발표됩니다. 한 단락을 옮깁니다.

당시 프랑스 정부의 의도와 국제 정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프랑스 함대를 요청하고 협력한 조선 천주교 신자들과 프랑스 선교사들의 행동이 결과적으로 우리 민족에게 큰 고통과 상처를 안겨주는 불행을 초래했다. 강화 도민과 민족에게 병인양요로 인한 아픔과 상처를 안겨준 데 대해 천주교인으로서 깊은 사과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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