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강화도령 원범이의 첫사랑은

                                                                      ▲ 이경수
                                                                       - 강화읍 출생, 거주
                                                                       - 전)양곡고등학교 역사 교사


당신은 누구십니까
“강화도령인가, 우두커니 앉아 있게?”
속담집에 나오는 말입니다. 하는 일 없이 날만 보내는 사람을 비꼬아, “강화도령인가?” 이렇게 말한대요. 강화도령이 이원범이잖아요. 철종으로 즉위했으나, 무능하고 무기력해서 그저 멍때리며 세월을 보냈다는 인식이 속담에 담겼습니다.
‘강화도령’이라는 네 글자의 느낌이 사람마다 다릅니다. 어떤 이는 정겹게 여기고, 어떤 이는 냉소합니다. 두 느낌이 합해지기도 합니다.
제 첫 직장이 경남 마산의 어느 고등학교였습니다. 수십 명 교사 가운데 경기도 출신이 저 하나뿐이었습니다. 선생님들이 저를 이경수 선생이라고 불렀지만, 사실 더 자주 불린 호칭이 “강화도령!”이었습니다. 부르는 이나 듣는 저나 ‘강화도령’은 그저 친근하고 정겨운 별명이었습니다.
‘강화도령’에 양가적 감정이 스며 있는 데 반해, 임금 ‘철종’은 일관되게 부정적입니다. 허수아비 임금, 꼭두각시 임금이라는 것이죠. 정말, 과연, 철종은 그렇게 한심한 왕이었을까요?


▲ 강화도령 영화 주제가 음반 표지(강화역사문화연구소)

교동에서 강화로
지난 호에서 원범의 할아버지 은언군 이인과 아버지 전계대원군 이광을 소개했습니다. 역모사건에 연류되어 은언군과 가족이 강화로 귀양 왔다고 했습니다. 은언군은 10여 년 유배 살다가 사망했고, 이광은 30여 년 만에 풀려나 강화에서 서울로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서울 가서 결혼하여 이원범을 낳았다고 했습니다.
원범이 강화에서 태어났다고도 말해집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처럼, 아버지처럼, 강화로 유배됩니다. 14살에 강화에 귀양 와서 19살에 임금이 되어 한양으로 갔습니다. 강화에서 5년 동안 살았습니다.
“원범 유배지가 교동이라는 소리가 있던데?”
맞습니다. 처음에는 교동으로 갔습니다. 얼마 뒤 강화읍으로 옮겨집니다. 원범이 교동에서 유배살이한 기간은 대략 20일 정도입니다. 길지 않았어요. 《교동군읍지》(1899)에 철종이 교동읍성 동문 안 초가에 머물다 강화도로 옮겨졌다고 나옵니다. 《속수증보강도지》(1932)도 철종 유배지가 “예전에 교동읍성 동문 안에 있었는데 지금은 폐하고 주민들이 산다.”라고 적었습니다.
원범이 강화로 유배된 이유는 할아버지·아버지처럼, 또 역모사건에 엮였기 때문입니다. 역모 세력이 헌종을 내몰고 이원경을 새로운 왕으로 앉히려고 하다가 적발됐습니다. 이원경은 이광의 적장자입니다. 그러니까 이원범의 이복형입니다. 이원경은 죽임을 당했고, 원범 등 가족들은 유배 형벌을 받은 것입니다.
왕족의 지위가 워낙 높고 생활이 화려하니, 백성들이 선망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왕족은 언제 갑자기 죽임을 당할지 모르는 운명이었습니다. 누군가 반역을 꾀하다 붙잡혔다고 가정합시다. 그가 새로운 임금으로 왕족 아무개를 모시려 했다고 말하는 순간, 아무개는 사형을 피하기 어렵게 됩니다. 반역 음모에 관해 아무것도 몰랐고, 아무 죄가 없어도,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습니다.

누가 ‘강화도령’이라 했나
‘강화도령’을 철종이 강화에서 귀양 살 때 생긴 별명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그때는 강화도령으로 불리지 않았습니다. 강화 사람들이 굳이 강화라는 말을 붙여서, 원범을 강화도령이라 부를 이유가 없습니다. 도령으로 불러야 한다면, 한양에서 왔으니, ‘한양도령’이라 하면 되는 것입니다.
‘강화도령’은 강화 바깥에서 생긴 호칭일 것이고 그렇다면, 원범이 강화를 떠나 즉위하게 되는 그 무렵에 생겨난 호칭으로 보는 게 적절합니다.
일제강점기인 1931년, 동아일보에 ‘도성인민(都城人民)’들이 그러니까 한양 사람들이 새 임금을 ‘강화도령님’으로 불렀다는 글이 실렸습니다. 장가가기 전이라서 그렇게 불렀다고 했습니다.
철종이 한양으로 즉위하러 갈 때 수많은 사람이 곳곳에서 몰려나와 구경했습니다. 한양에도 많은 인파가 몰렸습니다. 평생에 한 번 보기 힘들 장면이니 사람들 모이는 게 당연하지요.
새 임금이 즉위하는 것만도 백성들에게 일대 사건이요, 큰 뉴스인데 하물며 새 임금이 강화에서 온다니! 임금은 궁궐에서 태어나 자라고 거기서 왕이 되는 법인데, 그게 아니라 외지에서 모셔온다니! 새 임금이 강화에서 온다는 자체가 신기했을 것입니다.
한양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를 상상해 봅니다.
“세상에! 강화에서 모셔온다네.”
“몇 살쯤 되셨으려나.”
“열아홉이라지 아마. 아직 총각이라는 것 같던데.”
“도령님일세, 강화도령님!”


▲ 영화 ‘강화도령’ 신문 광고[출처 마산일보, 1963]

‘강화도령’이 널리 알려진 배경
다음 글은 어느 소설에서 옮겨온 것입니다. 뭔가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 〉에 들어갈 물품은 무엇일까요? 힌트, 세 글자입니다.

사각형을 그리고, 그 안에 동그라미를 그려 넣고, 세 개의 작대기를 동그라미 위에다 세로로 걸쳐 놓았습니다. 그런 뒤 누나가 하는 대로 빗금을 세 갠가 긋고 돼지꼬리 같은 걸 맨 마지막으로 그려 넣으니 훌륭한 〈 〉 그림이 되었던 것입니다.

강화 출신 소설가 구효서의 《라디오 라디오》(1995)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그럼, 정답이 라디오? 아니고요, ‘스피커’가 정답입니다. 돌아보니 그런 때가 있었네요. 스피커가 라디오였던 시절 말입니다. TV로 연속극을 보는 시대가 아니라 스피커나 라디오로 연속극을 듣던 시대였습니다.(‘스피커’가 무엇인지 자세히 설명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그때, 1963년 초, 연속극 하나가 엄청난 인기를 끕니다. 이서구가 극본을 쓴 ‘강화도령’입니다. 물론 원범이 이야기이지요. 물 들어올 때 노 젓는다고, 영화도 만들어집니다. 신상옥 감독에 신영균과 최은희가 주연한 ‘강화도령’입니다. 역시 대히트! 그래서 속편 영화 ‘철종과 복녀’까지 나오게 됩니다.
라디오 연속극과 영화로 잇달아 강화도령이 소개되면서 이후 ‘강화도령’이라는 단어가 널리 퍼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남녘 끝 마산의 학교에서도, 강화 출신 교사를 자연스럽게 강화도령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분 가운데 영화 ‘강화도령’을 보신 분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1963년 작품이니까요. 그런데, 저는, 보았습니다. 나이가 몇인데? 어떻게?
유튜브에서 ‘강화도령’을 검색하면 바로 이 영화가 나옵니다. 한국영상자료원에서 화면과 음향을 깨끗하게 다듬어서 공개했습니다. 2시간이 넘는 대작, 흑백영화인데요, 볼만합니다.


▲ 임금님의 첫사랑 스틸[출처 - 꿈속의 나비 블로그]

임금님의 첫사랑
드디어 세상에 TV가 나왔습니다. 드디어 원범을 주인공으로 하는 TV 드라마도 등장하게 됩니다. 1975년부터 1976년까지 TBC(지금 KBS2) 방송국에서 방영된 사극, ‘임금님의 첫사랑’입니다. 신봉승이 극을 썼습니다. 줄거리가 대략 이러해요.
원범(김세윤 분)이 강화에서 유배 살 때 양순이(김미영 분)와 사랑하게 된다. 첫사랑이다. 그런데 원범이 생급스럽게 임금이 되고 만다. 원범은 강화에 두고 온 양순이를 궁궐로 불러올리려 했으나 하지 못했다. 그저 그리워만 했다. 서로 지독하게 원했지만 지독하게도 둘은 만날 수 없었다. 결국, 양순은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된다.
‘임금님의 첫사랑’은 말 그대로 장안의 화제였습니다. 전남 백양사에서 보내준 삭도(머리 깎는 칼)로 서울 봉원사에서 삭발의식을 치른 양순이 역 김미영, 여배우 최초의 삭발이라 당시 커다란 관심을 끌기도 했습니다. 양순이 어머니 역의 배우 사미자는 강화 사투리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해서 또한 화제가 되었습니다.
드라마 ‘임금님의 첫사랑’을 기억하시는 분들은 많을 거예요. 어느 강의에서 이 연속극 주제 음악을 틀었더니 적지 않은 분들이 따라 부르시더군요.

강화섬 꽃바람이 물결에 실려 오면

머리 위에 구름이고 맨발로 달려 나와

두 마리 사슴처럼 뛰고 안고 놀았는데

갑고지 나루터에 돛단배 떠나던 날

노을에 타버리는데 임금님의 첫사랑


1절만 옮겼습니다. 가사가 예뻐요. “두 마리 사슴처럼 뛰고 안고 놀았는데” 원범이와 양순이의 싱그러운 사랑이 그려집니다.
그런데요, 라디오 연속극 ‘강화도령’에서는 원범의 첫사랑 이름이 봉이였고, 영화 ‘강화도령’에서는 복녀였습니다. 봉이, 복녀, 양순이. 셋 중 진짜 원범의 첫사랑 이름은 무엇일까요?
알 수 없습니다. 모릅니다. 아예 원범의 첫사랑이 없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왜?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 그게 사실은 아닙니다. 드라마 극본은, 그게 사극이라고 해도, 기본적으로 작가가 창작한 허구입니다. 드라마의 재미를 위해 작가가 봉이, 복녀, 양순이라는 허구의 인물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실존 인물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사랑은 모든 극의 주요 소재입니다. 이게 빠지면, ‘앙꼬’ 없는 찐빵이 되기 쉽습니다. 생각해보셔요. 드라마나 영화 ‘강화도령’에 원범의 사랑 이야기가 없었다면, 사람들이 그렇게 재밌게 보았을까요? 아닐 겁니다. 큰 인기를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양순이를 원범의 첫사랑으로 굳게 믿고 계셨던 분, 혹시 실망하셨어요? 그럴 필요 없습니다. 역사적인 사실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이야기는 이야기대로, 스토리텔링은 또 그대로 소중합니다. 양순이는, 임금님의 첫사랑은, 여전히 값진 강화의 문화 자산입니다.
영화에서 원범은 나무꾼으로 나옵니다. 어디 영화만 그런가요. 인터넷에서 찾아봐도 원범이 강화에서 나무꾼으로, 농사꾼으로 살았다고 나오죠. 먹고살려니 어쩔 수 없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무꾼 출신 임금님, 농사꾼 출신 임금님으로 소개됩니다. 구박데기로 살다가 신발 한 짝이 계기가 되어 왕자와 혼인하는 신데렐라와 비교되기도 합니다.
원범은 정말 나무꾼이었을까요?
다음 호에서 알아보겠습니다. 임금 철종의 모습도 조금 살펴보겠습니다. “강화도령인가, 우두커니 앉아 있게?” 이 속담이 타당한 것인지도, 생각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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