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사도세자의 아들, 은언군

                                                                      ▲ 이경수
                                                                      - 강화읍 출생, 거주
                                                                      - 전)양곡고등학교 역사 교사


사도세자의 죽음
쌀도 아닌데, 사람인데, 그것도 무려 세자였는데, 뒤주에 갇혔습니다. 때는 1762년(영조 38) 윤달 5월 13일. 양력으로는 7월 4일, 꽤 더울 때였습니다. 뒤주 속 세자는 목마름과 배고픔을 견디다 9일 만인 윤달 5월 21일에 죽고 맙니다. 향년 28세!
그를 죽인 아버지 영조가 사도세자(思悼世子)라는 시호를 내립니다. 죽일 거라면, 사약 정도로 하지, 굳이 뒤주에…. 思는 생각할 사, 悼는 슬퍼할 도 자(字)입니다.
영조는 사도세자(1735~1762)가 왕이 되면 나라가 망할 거라고 했습니다. 글쎄요, 모르겠습니다. 사도세자가 정신병을 앓았다는 말도 있고, 반역을 꾀했다고도 전합니다. 소론 세력의 지지를 받는 사도세자를 노론 세력이 죽게 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습니다. 현재의 권력과 미래의 권력이 충돌한 것이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진실은 안갯속에 숨었습니다.
사도세자가 정말 정신 질환을 앓았다면, 아버지 영조의 책임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세자가 어릴 때는 영조도 자애로운 아버지였습니다. 그런데 점점 지나치게 엄해졌습니다. 자식이 훌륭한 임금이 되게 하려는 의도였습니다만, 자식은 외려 엇나갔습니다.
세자는 아버지가 하라고 한 것에는 소홀하고, 하지 말라고 하는 것에 열심이었습니다. 기생은 물론이고 여승까지 궁으로 불러들여 품었다고 하는데, 여자를 밝혀서 그런 게 아닐 것입니다. 아버지를 속상하게 하려는 일종의 반항 행위일 수도 있습니다. 아버지도 아들도 외로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 장조(사도세자) 융릉[경기 화성]

선위 파동
특히 사도세자의 심신을 피폐하게 만든 건 영조의 선위(禪位, 임금 자리를 물려 줌) 파동이었습니다. 영조는 재위 기간에 몇 번이나 왕위를 세자에게 물려주겠다고 했습니다. 선위하겠다는 게 왜 문제가 될까요?
태종 때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태종 이방원이 세자에게 선위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러자 세자의 외삼촌 얼굴에 미소가 살짝 비쳤습니다. 기뻐하는 기색이 겉으로 나타난 겁니다. 그게 죄가 되어 귀양 갔습니다. 사형당하지 않은 게 다행입니다.
임금이 선위하겠노라, 그랬을 때, 어느 신하가 “예, 그렇게 하시지요.” 그랬다간 경을 칩니다. 조선시대에 여러 임금이 선위를 말하곤 했는데 진심으로 말한 임금은 아주 드뭅니다.
대개 선위라는 이슈를 조정에 던져 놓고 신하들과 세자가 어떻게 나오는지 두고 보는 겁니다. 충성심을 확인하려는 정치 행위인 셈이지요. 이 과정에서 세자 편을 드는 것 같은 언행을 보이면, 죽임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신하와 세자는 정답을 압니다. “아니 되옵니다.” 더해서 표정 관리도 잘해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웃음기를 띠면 큰일납니다.
선조도 몇 번이나 광해군에게 선위하겠다고 했습니다. 조정은 온통 아니 되옵니다, 당신만이 최고이십니다, 했습니다. 광해군은 더 간절하게 아니 되옵니다, 해야 했습니다. “너희들이 이리도 절절하게 원하니, 내 선위 명을 거두노라!” 이렇게 선조는 ‘재신임’을 받곤 했어요. 참 피차 피곤한 일입니다.
이런 정치 행위를 영조도 한 것입니다.
영조는 불과 두 살 먹은 아들을 세자(사도세자)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사도세자 나이 5살 때 선위 파동을 일으켰습니다. 겨우 5살 먹은 아가한테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한 것입니다. 선위의 명을 거두시라는 조정의 절규 속에서, ‘죄인’ 된 사도세자는 석고대죄해야 했습니다. 선위 선언이 나오는 순간, 왕위 계승권자인 세자는 일단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한번이 아니었습니다. 사도세자 6살 때, 15살 때, 18살 때, 23살 때, 거듭 선위를 명했습니다. 한겨울 눈보라 속에서도 사도세자는 궐 마당에 거적을 깔고 엎드려 “신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부디, 용서하시고, 선위의 명을 거두어 주소서.” 울부짖어야 했습니다. 속으로는 이런 생각을 했을 겁니다. ‘제가 언제 왕위를 물려달라고 했습니까? 제발 그만 좀 하십시오.’
1757년(영조 33) 11월 어느 날 밤, 대신들이 모인 자리. 영조가 사도세자를 마구 질책합니다. 23살 사도세자는 그저 엎드려 슬피 웁니다. 뭐라고 변명의 말도 못 하고, 머뭇거립니다. 영조는 그게 또 답답하고 화가 납니다. 왕이 될 놈이 말 한마디 못하는가?
말 잘하는 사도세자가 아버지 앞에만 가면 몸이 굳고 혀가 굳습니다. 겨우 튀어나온 몇 마디 말도 그냥 더듬습니다. 그만큼 영조가 무서운 겁니다. 보다 못한 신하가 영조에게 아룁니다.
“전하께서 너무 지나치게 엄해서 세자가 늘 두려움에 떨고 마음이 위축됐습니다. 그래서 대답을 시원하게 하지 못하고 주저주저하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세자를 따듯하게 대해주시고, 잘못은 조용히 훈계해주시옵소서. 그러면 자연히 나아질 것입니다.”
그날 밤, 영조가 생급스럽게 선위를 또 선언합니다. 신하들은 당혹스럽습니다. 이후 벌어진 일을 실록은 이렇게 적었습니다.
“동궁이 물러나와 뜰에 내려가다가 까무러쳐서 일어나지 못하니, 유척기가 급히 의관을 불러 진맥하도록 청하였다.”
졸도했던 사도세자는 청심환을 먹고서야 겨우 깨어났습니다.


▲ 은언군 신도비[서울 흥창사]

은언군의 눈물
사도세자와 세자빈 혜경궁 홍씨 사이에서 정조가 태어났습니다. 사도세자는 궁녀와도 관계하여 은언군을 낳았습니다. 그러니까 은언군(1754~1801)은 정조 임금의 이복동생입니다. 이름은 이인(李䄄)이고요.
왕은 궁녀를 품을 수 있으나, 세자는 자중하는 것이 법도였습니다. 그러니 은언군 출생은 축하받을 일이 아니었습니다. 사도세자는 영조에게 혼날 게 두려워서 뱃속 아가를 지우게 하려고 했답니다. 하지만, 은언군이 세상에 나오고 말았지요. 영조는 여러 날에 걸쳐 사도세자를 꾸짖고 혼냈습니다.
은언군 모자는 박대의 대상이었습니다. 눈칫밥 먹으며 외롭게 큰 은언군, 눈길 한번 주지 않는 아버지가 야속했겠지요. 그래도 아버지라는 존재가 든든함 그 자체였는데, 그 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에서 숨졌습니다. 이후 은언군은 궁궐에서 쫓겨납니다.
1767년(영조 43), 13살 때, 은언군이 장가들게 됩니다. 송낙휴의 딸을 부인으로 맞았습니다. 은언군의 혼례 택일 때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야사로 전하는 이야기가 아니고, 《승정원일기》에 실린 사실입니다.
그해 7월에 담당 신하가 영조에게 보고합니다. “다음 달 윤7월 초가 길일(吉日)입니다. 윤7월 보름부터 11월까지는 흉일(凶日)입니다. 그리고 12월도 길한 달입니다.” 그러면서 언제로 택일할지 물었습니다. 영조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11월에 은언군의 혼례를 거행하라.”
무심히 읽으셨다면, 다시 한번 읽어보세요. 영조는 굳이 좋은 날을 피하고, 흉하다고 하는 나쁜 달 11월에 혼례를 치르라고 했습니다. 심술입니다. 그렇게도 은언군이 싫었나 봅니다. 그래도 왕손인데, 당신 손자인데….
궁 밖에서 사는 은언군, 행실이 반듯하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이런저런 소소한 사고를 쳐서 물의를 일으키고 급기야 제주도까지 귀양 갔다가 풀려납니다. 꽤나 할아버지 영조의 속을 썩였습니다.
세월이 갔고 영조의 세월도 갔습니다. 1776년에 정조가 즉위합니다. 이때 정조 나이 25세, 은언군은 22세였습니다. 정조가 아우 은언군을 잘 돌봐주었습니다. 은언군, 이제 꽃길만 걷나 싶었습니다만, 아니었습니다.


▲ 철종외가

유배지에서 마친 삶
즉위 초, 정조가 믿고 의지했던 이가 홍국영입니다. 홍국영은 정조를 지키려고 무진장 애썼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점점 사욕이 커진 것 같습니다. 1778년(정조 2)에 자기 누이동생을 정조의 후궁으로 들입니다. 원빈홍씨입니다.
홍국영은 원빈홍씨가 아들 낳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그 아들이 세자가 되기를 욕망했습니다. 하지만, 후궁 된 지 1년여 만에 원빈홍씨가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딱 멈추었으면 모두에게 좋았을 것을, 홍국영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하필이면 은언군의 아들 이담을 죽은 누이 원빈홍씨의 양자로 삼은 것입니다.
홍국영은 조카가 된, 은언군 아들 이담을 ‘가동궁(假東宮)’으로 부르기도 했습니다. 세자로 세우려는 흑심을 드러낸 것입니다. 정조 때는 물론이고 다음 임금 때에도 권력을 누리겠다는 의도로 볼 수밖에 없는 행위였습니다.
결국, 정조는 홍국영을 축출합니다. 1781년(정조 5), 34세 홍국영이 강릉에서 세상을 떠납니다. 홍국영은 이렇게 끝났으나 은언군의, 은언군 집안의 고난은, 이제 시작입니다.
홍국영이 이담을 왕으로 세우려 했다는 소리가 조정에 돌면서 역모사건으로 규정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은언군 이인과 이담 부자도 역적으로 몰려 공격받게 됩니다. 1786년(정조 10)에 이담이 의문의 죽음을 맞고, 이후 사건이 커지면서 이인이 귀양 가게 됩니다. 정조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이인과 가족이 강화로 귀양 오게 됩니다. 신하들이 은언군 이인을 죽여야 한다고 외쳤지만, 정조는 끝끝내 이인을 지켜주었습니다. 부족함 없이 먹고 살 수 있도록 경제적 지원도 해주었습니다. 겉모습은 귀양인데, 실상은 한양에서 강화로 이주한 것 같았습니다.
세월이 또 갔습니다. 정조가 세상을 떠나고 순조가 11살 나이에 즉위했습니다. 대왕대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합니다. 1801년(순조 1), 정순왕후가 은언군의 부인 송씨와 며느리 신씨(이담의 부인)에게 사약을 내려 죽입니다. 천주교 신자라는 ‘죄’였습니다. 그리고 은언군과 자식들을 천극안치하라고 명합니다.
지금까지 넓은 집에서 그런대로 편히 지내던 은언군인데 이제 꼼짝없이 가시울타리로 꽉 막힌 방안에 갇혀 지내게 됐습니다. 얼마 뒤 은언군이 울타리를 뚫고 밖으로 나왔다가 붙잡힙니다. 사약을 받고 죽임을 당합니다. 15년 넘게 이어진 강화도 유배 생활이 이렇게 끝났습니다. 48년 파란만장했던 은언군 이인의 삶도 이렇게 끝났습니다.
은언군은 갔으나 그의 아들들은 여전히 강화에서 귀양 살고 있습니다. 1822년(순조 22), 즉위할 때 11살 꼬마였던 순조가 33세가 됐습니다. 이때 순조가 은언군의 자식들을 풀어주고, 한양으로 불러올려 결혼하게 해줍니다. 풀려난 자식 중에 이광(1785~1841)이 있습니다. 2살에 부모 따라 강화에 유배되어 38세 때 비로소 풀려난 것입니다.
이광은 뒤늦게 결혼하고 자식을 봅니다. 부인 최씨에게서 이원경, 측실 이씨에게서 이경응, 측실 염씨에게서 이원범을 얻었습니다. 막내아들 원범이 철종으로 즉위하면서 전계대원군으로 추존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원범만 강화에서 유배 산 것이 아닙니다. 할아버지 이인, 아버지 이광, 그리고 이원범! 삼대의 유배지가 모두 강화였습니다. 그래서 강화종실(江華宗室)이라는 말이 생겨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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