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동검도가 검문하던 섬일까요?

▲ 이경수

                                                                                     - 강화읍 출생, 거주
                                                                                     - 전)양곡고등학교 역사 교사


동검도에 동검북돈대
이 작은 섬에 처음 가본 게 고등학생 때였습니다. 학교에서 수련회 같은 걸 거기서 했어요. 그땐 길상면 선두리에서 작은 나룻배를 타고 건너갔습니다. 맑고 맑은 어촌 마을이었습니다. 전망 끝내주는 자리에 동검국민학교도 있었지요.
1986년에 선두리와 동검도를 잇는 연륙교가 놓였습니다. 오랜 세월, 사람 실어 나르던 나룻배가 그때 은퇴 당했습니다. 오가기 편해졌지요. 풍광 좋은 섬이라, 관광객이 점점 늘었습니다. 섬에 흐르던 ‘고즈넉’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폐교된 동검국민학교는 이제 건물조차 없습니다.
연륙교 덕에 사람은 편해졌지만, 건강하던 갯벌이 병들었습니다. 둑 쌓듯, 제방 형태로 만든 연륙교라서 갯벌이 서로 끊긴 겁니다. 강물이건, 바닷물이건, 물은 흘러야 하는 데 흐르지 못했습니다.
2018년, 드디어, 끊겼던 갯벌이 다시 이어졌습니다. 연륙교 구간 일부, 130m를 헐어내고 물이 왕래할 수 있도록 다리를 새로 설치한 겁니다. 참 잘한 일입니다.
동검도에 동검북돈대가 있습니다.
1679년(숙종 5)에 병조판서 김석주 주도로 48개 돈대가 설치됐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동검북돈대예요. 택지돈대·후애돈대와 함께 선두보에 속했습니다. 이후 돈대가 더 늘어나 최종적으로 54개가 됩니다.
54개 돈대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게 바로 동검북돈대입니다. 둘레가 무려 261m. 다른 돈대의 두세 배 크기죠. 강화 본섬 밖에 설치된 유일한 돈대이기도 하고요. 돈대 안에 봉수 시설까지 갖춘 점도 특이합니다. 돈대 만들 당시에 봉수대도 함께 마련한 것인지, 아니면 나중에 봉수대가 추가된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동검북돈대는 개성이 뚜렷한 문화유산입니다. 지금은 무너져 형태를 잃었습니다. 돈대 안은 울창한 숲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돌무더기가 수북하여 옛 모습을 그려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해요, 김석주가 돈대를 세우며 지은 이름은 ‘동검도돈대’인데 어인 일인지 동검북돈대로 개명됐습니다. 북(北)자가 들어가니, 동검남돈대도 있을 것 같은 착각을 부릅니다. 동검남돈대는 없습니다.

나룻배와 행인
강화읍 버스터미널 입구에 ‘강화여객자동차터미널’이라고 새긴 커다란 돌비가 섰습니다. 그 뒷면에 ‘나룻배와 행인’이라는 시(詩)가 새겨져 있습니다. 가시게 되면 한번 확인해보세요. 왠지 동검도와 어울리는 것 같아 옮깁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얕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가십니다 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아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아갑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이 시를 지은 분은, 그 유명한 만해 한용운입니다. 민음사에서 나온 시집 《님의 침묵》에 수록된 작품 가운데 하나입니다.

검문하던 섬?
동검도가 조선시대에 염하(강화해협)로 오르는 배들을 검문하던 섬이라는 얘기가 폭넓게 퍼져 있습니다. 서쪽의 서검도도 마찬가지 기능을 했다고 하지요. 그런데 저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따져봐도, 아닌 것 같습니다. 동검도에 일종의 검문소가 있었다고 기록한 사료를 찾지 못했습니다.
검문 얘기가 나오는 현대 자료로는 강화문화원에서 낸 《강도지명고》(1992)와 《강화지명지》(2002)가 있습니다.
《강도지명고》는 “구비설화에 의하면 이조 말엽에 영국(미확인) 사람이니 군인으로 보이는데 강화에 잠입하여 이 섬 동편에 있는 당재라는 고장에서 봉화로써 신호하였고 행인을 검문하였기에 東檢島라 하였다는 말이 전하여지고 또 일설에는 천주교가 비로소 강화에 상륙한 곳으로 이 고장은 검문이 자심하여 타지방으로 포교차 옮겨갔다고 한다.”라고 쓰면서 “신빙성은 희박한 설화이다.”라고 평했습니다.
문장이 좀 어색합니다. 어딘가 앞뒤도 안 맞습니다. 서양인이 들락거리는 조선 말이 아니라 훨씬 이전부터 東檢島라는 지명이 존재했습니다. “신빙성은 희박한 설화이다.”라는 평가가 지당합니다.
《강화지명지》는 이렇게 기록했네요. “동검도는 강화 동남방에 위치하고 있어, 서해와 남해상에서 강화, 김포해협을 거쳐 한강을 통하여 서울로 진입하는 배들을 검문하던 곳이라 하여 동검도(東檢島)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위치를 따져봅시다. 동검도에서 염하 입구까지는 의외로 멉니다. 배들이 동검도를 안 거치고 그냥 염하로 올라가도 제어할 수 없는 거리입니다. 서해안에서 올라오는 배들이 동검도까지 갖다가 다시 염하로 간다는 것은 현실성이 떨어집니다.
만약 정말 검문하는 섬이 필요했다면, 동검도가 아니라 황산도라고 해야 그나마 말이 될 것입니다. 한편, 손돌목에서는 일종의 검문이 행해지기도 했습니다. 다음은 신미양요(1871) 시기에 강화유수 정기원이 조정에 보고한 내용인데 《고종실록》에 실렸습니다.

“미국 배 2척이 손돌목으로 들이닥쳤는데, 여기는 우리나라 수역 내의 포구로서 중요한 요새지입니다. 병인년의 난리를 거친 다음부터 군사를 늘리고 방비를 더 엄하게 해서 설사 우리나라의 관청이나 개인의 배라고 하더라도 통행증이 없으면 통과시키지 않았습니다.”

‘병인년의 난리’ 즉 병인양요(1866) 이후 손돌목에서 ‘검문’했다는 소리입니다. 그렇습니다. 염하 입구에 있는 황산도나, 폭이 유독 좁은 광성보 손돌목 정도면, 오가는 배를 통제하고 관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동검도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아무래도, 동검도가 검문(檢問)하던 섬으로 알려진 것은, 사람들이 東檢島의 ‘檢’(검사할 검)자 뜻을 통해, 미루어 짐작해서 말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렇게 이야기가 퍼지고 점차 살이 붙으면서, 마치 사실인 것처럼 오해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東儉島·東黔島·東檢島
그런데 말입니다, 지금 동검도의 공식 한자가 東檢島이기는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다른 한자도 함께 쓰였습니다. 먼저 보이는 것이 ‘東儉島’입니다. ‘儉’은 ‘검소할 검’ 자입니다. 김석주가 돈대를 쌓을 때 東儉島라고 기록했습니다. 《숙종실록》에도 東儉島로 나와요.
조선 후기에 편찬된 강화의 읍지가 여러 편 있습니다. 읍지에는 동검도 한자를 어떻게 적었나 볼게요.


《강도지》
1696
《강도부지》
1760
《강화부지》
1783
《속수증보강도지》
1932
東檢島
小檢島
東黔島
東檢島

아, 동검도의 또 다른 이름이 있었네요. 《강도부지》가 동검도를 소검도라고 칭했습니다. 그런데 《강화부지》가 東黔島라고 적었습니다. ‘黔’은 ‘검을 검’ 자입니다. 동검도의 한자 표기로 儉·黔·檢, 이렇게 세 개가 쓰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짐작하셨겠지만, 강화 읍지마다 동검도와 서검도를 기록했어도 검문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동검도에는 양목장이 있고 서검도에서는 소금을 구웠다는 말 정도만 했습니다.
儉·黔·檢, 이 세 글자를 번역할 때마다 동검도의 의미가 달라지겠죠? 동쪽의 검소한 섬, 검은 섬, 검문하는 섬! ‘검문’만 의미하는 게 아닌 거예요.
아시다시피, 한자는 한 글자에 한가지 뜻만 있는 게 아니죠. 검을 검(黔)자는 귀신 이름, 또는 신 이름이라는 뜻으로도 쓰입니다. 단군왕검의 한자 표기는 檀君王儉입니다. 儉자가 김석주가 쓴 東儉島의 儉과 같은 글자입니다. 뭔가 다른 의미가 내포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요, 한자가 뜻글자이지만, 소리를 빌려 쓰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럴 때는 한자 뜻을 따지는 게 무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프랑스를 한자로 佛蘭西(불란서)라고 쓰잖아요. 여기서 佛, 蘭, 西라는 글자의 뜻은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이런 걸 음차(音借)라고 합니다.
동검도의 검(儉·黔·檢)을 뜻으로 풀지 말고, 음차로 봐야 한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인천광역시에서 낸 《인천의 지명 유래》(1998)에 따르면, 儉·黔·檢은 신(神)을 가리키는 우리 고유어 ‘’의 변형된 형태라고 합니다. ‘’을 한자로 옮기면서 儉이 되고, 黔이 되기도 하고, 또 檢이 되기도 했다는 얘기입니다.
그렇다면, 동검도를 검문하던 섬으로 푸는 것보다 신격(神格)과 연결된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사실에 가까울지도 모릅니다. 막연하나마, 추정하자면, 동검도와 서검도는 뱃사람들이 넓은 바다로 나가기 전에 풍어와 무사 귀환을 비는, 신성한 기도처 정도의 의미를 내포한 지명이 아닐까, 싶습니다.
조선시대에 ‘검문’, ‘검문소’ 이런 말을 쓰기는 했을까요?
《승정원일기》에 ‘검문(檢問)’이라는 단어가 나오기는 합니다. 하지만, 지금 쓰임새와 뉘앙스가 다릅니다. 조선시대에, 오늘날의 검문이라는 의미와 비슷하게 쓰인 단어는 기찰(譏察)입니다. 규검(糾檢), 체탐(體探), 수하(誰何), 파절(把截)도 유사한 의미로 쓰였습니다. 검문이라는 말이 일상 용어가 아니었습니다. 검문소(檢問所)라는 단어는 아예 없었습니다.
‘검문’과 ‘검문소’가 일상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입니다. 그전에는 사실상 쓰지 않았다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일종의 근대 용어가 ‘검문’이요, ‘검문소’입니다.
따라서 동검도·서검도가 검문하던 섬이라서 그렇게 이름을 붙였다고 하는 설(說)은, 시기적으로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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