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벌대총 그리고 진과 보

 ▲ 이경수
- 강화읍 출생, 거주
- 전)양곡고등학교 역사 교사



오매불망 강화도

대가가 새벽에 산성을 출발하여 강도로 향하려 하였다. 이때 눈보라가 심하게 몰아쳐서 산길이 얼어붙어 미끄러워 말이 발을 디디지 못하였으므로, 상이 말에서 내려 걸었다. 그러나 끝내 도착할 수 없을 것을 헤아리고는 마침내 성으로 되돌아왔다. 《인조실록》

1636년(인조 14) 12월 15일의 상황입니다. ‘산성’은 어느 산성일까요? 남한산성입니다. 병자호란 때 얘기입니다. 전날인 12월 14일에 인조와 조정은 남한산성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날에 인조가 몰래 성을 나와 강화로 향했던 겁니다.
하지만 길이 너무 미끄러워서 포기하고 남한산성으로 되돌아갔습니다. 다른 사료에는 “15일에 임금이 걸어서 가시다가 여러 번 엎어지셔서 옥체가 불편하여 도로 성에 드시었다.”라고 나옵니다. 참 딱한 노릇입니다.
인조는 정말 강화로 가고 싶었습니다. 간절했습니다. 정묘호란 때처럼 이번에도 강화는 안전할 거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청나라 군대가 강화도만큼은 절대로 점령하지 못할 거라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강화가, 함락되고 말았습니다. 남한산성에 청천벽력이 내렸습니다. 어쩔 수 없이 인조와 조정은 성을 나와 삼전도에 가서 항복 의식을 치릅니다. 이를 우리는 ‘삼전도의 굴욕’이라고 합니다.
김상용 선생 등과 함께 강화에 들어와 있었던 봉림대군은 강화가 무너지는 과정을 모두 지켜보았습니다. 강화에서 삼전도로 끌려갔고 조선의 인질이 되어 청나라까지 끌려갑니다. 몇 년 뒤에 겨우 귀국해서 임금이 됩니다. 그이가 바로 효종(재위:1649~1659)이지요.
효종은 군사력을 키우며 북벌(北伐)을 준비합니다. 청나라를 쳐서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어내겠다는 계획입니다. 효종은 강화와 인연이 꽤 깊은 인물입니다. 그와 관련하여 전설이 전해 옵니다. 가지가 워낙 복잡하게 퍼져서 원형의 이야기가 무엇인지 단언하기 어렵습니다만, 대략 이런 내용입니다.


▲ 광성보 안해루

벌대총 이야기
효종이 북벌의 칼을 갈며 전국적으로 명마를 구할 때였습니다. 강화도 진강산 바위에서 태어난 용마가 있다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강화유수가 그 말을 효종에게 바쳤습니다. 말을 본 효종이 크게 기뻐하며 벌대총(伐大驄)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총(驄)’은 말[馬]이라는 뜻이에요.


효종은 북벌을 이루라는 하늘의 선물로 여기며 벌대총을 아꼈습니다. 벌대총은 그야말로 명마였습니다. 염하를 헤엄쳐 건너는 등 만화 같은 활약을 펼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벌대총이 병들어 누웠습니다. 백방으로 손을 썼으나 고치지 못했습니다. 낙담한 효종은 벌대총이 죽었다는 소리만큼은 절대 듣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여 “누구든 벌대총이 죽었다는 소리를 하면, 내가 목을 베리라!” 명했습니다.


모두가 벌대총이 일어나기를 고대했으나 죽고 말았습니다. 누구도 임금에게 고하지 못한 채 사흘이 흘렀습니다. 죽었다고 말하면 목을 벤다는 데 어찌 말하겠습니까. 그때 누군가 나서서 효종에게 말합니다. 

“황공하오나 벌대총이 일어나지 못한지가 사흘입니다.”

“벌대총이 어찌 되었다는 소리냐?”
“벌대총이 아무것도 먹지 못한 지 사흘이옵니다.”
“그래서?”
“벌대총이 숨 쉬지 못한 지 사흘이옵니다.”
“뭐라? 그러면 벌대총이 죽었다는 소리인가?”
“예, 그러하옵니다.”
결국, 벌대총이 죽었다는 소리를 효종 스스로 뱉어내고 말았습니다. 벌대총의 죽음은 북벌의 좌절을 의미하는 것으로 읽힙니다.


한편, 벌대총과 관련한 속담도 전해집니다. “양천 현감 죽은 말 지키듯 한다.”라고도 하고 “양천 원님 죽은 말 지키듯 한다.”라고도 합니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애만 태우는 상태를 의미하는 속담이라고 해요. 감잡으셨지요? 그렇습니다. 벌대총이 죽은 곳이 바로 양천현이었다고 합니다.

12진·보
효종은 북벌을 준비하면서 강화도 방어시설 구축에 골몰합니다. 강화도는 비상시 최후의 방어기지가 되는 곳입니다. 비록 병자호란 때 청군에게 함락되기는 했으나 효종은 여전히, 방어에 유리한 강화도의 자연조건을 신뢰했습니다. 청군에게 함락됐던 것은 지키는 이들의 잘못 때문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면, 효종이 강화도 방비를 위해 한 일이 무엇일까요?

“강화유수부가 바닷가에서 꽤 먼 곳에 있다. 바다에 갑자기 변고가 생기면 유수부에서 무기를 급히 옮겨와야 하는데 그게 여의찮다. 병자호란 때 내가 직접 겪은 일이다. 물가에 보를 설치하면 각 보의 변장(邊將)이 신속하게 대처하여 외적을 막을 수 있다. 그래서 강화도 연안에 보를 설치하려고 한다.”


1655년(효종 6) 어느 날 효종이 신하들에게 한 말입니다. 강화도 해안에 보를 설치하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보’는 ‘진’과 같은 의미로 보면 됩니다. 이렇게 해서 강화에 진·보가 설치됩니다. 그런데 ‘12진·보’가 모두 효종 때 설치된 것은 아닙니다.


효종 때 세워진 진·보는 월곶진, 제물진, 초지진, 용진진, 인화보, 승천보, 화도보, 광성보, 이렇게 여덟입니다. 제일 먼저 설치된 월곶진·제물진·초지진은 강화 본섬에서 창설한 부대가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 옮겨온 부대입니다. 월곶진은 교동에서, 제물진은 인천에서, 초지진은 안산에서 옮겨왔습니다.


강화의 해안 경계 부대인 진·보는 역할이 같습니다만, 지휘자의 지위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진(鎭)은 첨사(종3품)나 만호(종4품)가 책임자이고, 보(堡)는 대개 별장(종9품)이 지휘자입니다. 진·보의 첨사·만호·별장을 진장(鎭將) 또는 변장(邊將)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요, ‘진’, ‘보’ 명칭이 내내 고정됐던 것이 아닙니다. 진이었다가 보가 되기도 하고, 보가 진이 되기도 합니다. 진과 보를 통틀어 진으로 표기한 사례도 사료에 흔하게 보입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5진 7보’, 그러니까 ‘12진·보’는 이렇습니다.
월곶진(月串鎭), 제물진(濟物鎭), 용진진(龍津鎭), 덕진진(德津鎭), 초지진(草芝鎭), 광성보(廣城堡), 선두보(船頭堡), 장곶보(長串堡), 정포보(井浦堡), 인화보(寅火堡), 철곶보(鐵串堡), 승천보(昇天堡).
효종 때 설립된 진·보 8곳 중에 ‘12진·보’에서 빠진 게 하나 있습니다. 한번, 찾아보세요.


예, 화도보가 없어졌습니다. 1656년(효종 7)에 선원면에 설치됐던 화도보가 중간에 폐지되고요, 대신 1710년(숙종 36)에 길상면에 선두보가 세워집니다. 선두보는 병인양요(1866) 때 또 다른 변화를 겪게 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실록 등 사료를 읽다 보면, 심심치 않게 ‘13진·보’라는 표현이 나와요. 왜 그럴까요? ‘13진·보’는 ‘12진·보’에 문수진을 포함한 것입니다. 문수진은 김포 문수산성 안에 설치한 진(鎭)입니다. 강화를 지키려고 문수산성을 쌓았듯, 문수진 역시 강화를 지킬 목적으로 설치한 것입니다. 강화유수가 문수진을 관리했습니다. 그래서 당시에는 ‘13진·보’라고 칭했던 것입니다. 물론 지금은 강화도 안에 있었던 것만 따져서 ‘12진·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정족진의 등장
병인양요(1866) 정족산성 전투에서 극적인 승리는 거둔 양헌수 장군이 조정에 승전 보고를 올렸습니다. 그 속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고종실록》에서 옮깁니다.


“전투에서 전사한 자는 포수인 양근 사람 윤흥길입니다. 부상당한 사람은 선두보 별장 김성표와 포수인 홍천 사람 이방원, 춘천 사람 이장성인데 모두 사생(死生)의 갈림길에 처해 있습니다.”


조선군의 주력이 민간인 포수임을 짐작할 수 있네요. 그런데 부상자 중에 선두보 별장이 있습니다. 당시 선두보는 정족산성 서문 바로 아래에 있었습니다. 선두보 별장 김성표도 소속 병사들을 이끌고 정족산성 전투에 참여했던 것입니다.

“방금 진무사 이장렴의 장계를 보니 ‘본영 소속 선두보 별장을 삼가 의정부의 복계에 의거하여 정족산성 별장으로 옮겨 두고…’, 하였습니다. 정족산성은 험한 요충지인데 선두보를 폐지하고 별장을 옮겨 둔 것은 바로 관방(關防)을 중하게 하고 관제(官制)를 보존한 일입니다.”

병조에서 고종에게 아뢰는 내용인데 《승정원일기》(1866.12.13.)에 실렸습니다. 화도보를 폐지하고 선두보를 설립했듯이 선두보를 폐지하고 정족산성진(정족진)을 설치했다는 얘기입니다.


그동안 조선 조정은 정족산성(삼랑성)을 무시했습니다. 쓸모없는 옛 산성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병인양요를 겪으며 비로소 이 산성의 중요성을 알았습니다. 더구나 산성 안에 전등사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고(史庫)도 있습니다. 각종 창고도 있습니다. 산성을 지킬 병력의 필요성을 인식했습니다.


새로운 부대 창설이 부담스럽기에, 선두보를 옮겨 정족진으로 삼은 것입니다. 정족진은 전등사 명부전 맞은편 산기슭에 있었습니다. 고려 가궐터로 알려졌던 곳과 겹칩니다. 2009년에 정족진 터에 대한 발굴조사가 진행되면서 그 실체가 확인되었습니다.


정리해봅니다.
처음부터 5진·7보, 12진·보가 아니었다. 효종 때 처음 설치되고 숙종 이후쯤에 12진·보 체제가 성립된다. 진과 보도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서 늘 5진·7보였던 것이 아니다. 화도보가 선두보가 되고 다시 선두보는 정족진이 되었다. 조선 후기 당시에는 문수진을 포함해서 ‘13진·보’로 칭했었다. 

<저작권자 ⓒ 강화투데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최벽하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