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창덕궁에 규장각, 강화에 외규장각

                                                                      ▲ 이경수
                                                                                         - 강화읍 출생, 거주
                                                                                         - 전)양곡고등학교 역사 교사


더위가 무서워
“내 평생 오늘이 제일 더운 것 같아.”
이 말을 열 번쯤 하고서야 8월의 끝을 봅니다. 더위도 더위지만, 끈적한 습기가 사람을 참 힘들게 했습니다. 더워도 습해도 할 일을 안 할 수 없는 법! 이번 호는 어떤 주제로 글을 쓰나, 고민합니다. 그래, 외규장각으로 하자.
결정하고 우선 고려궁지에 갔습니다. 오랜만에 외규장각 안에 들어가 봤어요. 중앙 자리 차지하고 있던 전시대를 치웠더군요. 좀 허전하다 싶다가, 아니, 외려 잘했다,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동안 좁은 실내 공간에 전시대까지 있어서 여러 명이 관람하기에는 불편했거든요. 벽면에 설치한 자료만으로도 외규장각이 어떤 곳이고, 거기 보관하고 있던 의궤가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 창덕궁 규장각

규장각과 집현전
조선시대 임금 가운데 가장 훌륭한 임금은?
대개 세종(1418~1450)을 꼽습니다. 버금가는 임금으로 정조(1776∼1800)를 말합니다. 저도 세종이 최고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인간적으로 정조에게 더 정이 갑니다. 즉위 당시 세종이 온실의 화초였다면, 정조는 거친 들판의 풀꽃 같은 존재였습니다.
태종 이방원은, 아들 세종에게 걸림돌이 될 것 같은 신하들을 미리미리 정리합니다. 자신에게 충성을 다한 신하라도, 앞으로 세종이 정사를 펼치는데 부담이 될 사람이다 싶으면, 과감하게 내쳤습니다. 그래서 세종은 안정적인 조정 환경 속에서 역량을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조는 왕이 되기 전까지, 되고 나서도, 암살 위협에 시달릴 만큼 고단한 삶을 살았습니다.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게 한 신하들, 자신마저 죽이려 했던 그 신하들이 포진한 조정입니다. 보통 멘탈이라면 진작에 무너지고 말았을 겁니다. 그런데 정조는 정글 같은 조정에서 반듯한 왕으로 우뚝 섭니다.
정조가 즉위한 해가 1776년입니다. 그런데 그 해에 바로 규장각(奎章閣)을 설치합니다. 창덕궁 안에다가요. 규장각은 역대 임금의 글씨 등과 국내외 희귀서적을 보관하는 왕실 도서관이면서 출판사이고 또 학문 연구 기관입니다. 집현전과 비슷한 셈입니다.
집현전이 있는데 왜 규장각을 세웠지?
집현전이 워낙 유명합니다만, 사실은 금방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세종이 1420년(세종 2)에 설치했는데 세조가 1456년(세조 2)에 폐지해버립니다. 조선왕조 500년 역사에서 집현전이 존재하던 기간은 햇수로 37년에 불과합니다.
세조(수양대군)는 단종의 왕위를 빼앗고 즉위했지요. 이에 맞서 단종을 다시 왕으로 모시려는 움직임이 일었지만, 발각됩니다. 단종복위운동을 이끈 이들 중에 집현전에 소속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세조가 집현전을 없애버린 겁니다.


▲ 의궤 이봉 행렬

정조의 싱크탱크
규장각이 표면적으로 왕실 도서관입니다만, 사실은 정조의 싱크탱크 기능까지 수행했습니다. 각종 정책을 연구하고 추진하는, 정조 개혁 정치의 중추 기관이었습니다. 정조가 왕권을 강화하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규장각에 속한 관리들은 ‘정조의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학문 능력도 뛰어나야 합니다. 기존 관리 중에서 구하기 어렵습니다. 정조의 선택은 서얼(庶孼) 출신 학자였습니다.
굳이 나누자면, ‘서’는 양반과 양인 첩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을, ‘얼’은 양반과 천민 첩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을 말합니다. 하지만 그냥 서얼을 일반적인 서자의 개념으로 보면 될 것입니다.
서얼은 학문이 뛰어나도 과거(문과)에 응시하기 어렵습니다. 대략 영조 때부터 서얼을 관직에 등용하는 정책이 추진됐습니다만, 거의 유명무실했습니다. 그런데 정조가 규장각에 서얼 출신 학자들을 뽑아 들였습니다. 유득공·이덕무·박제가입니다.
서얼을 뽑으면 신하들이 반발하겠죠? 더구나 과거 급제자들도 아니잖아요. 정조가 다 계획이 있었습니다. ‘검서관’이라는 자리를 새로 만들어 유득공 등을 등용한 겁니다. 기존 관직에 서얼을 임명하면, 과거 출신 관료들의 자리가 줄어들게 되고, 그러면 관료들이 반대할 겁니다. 그래서 새 관직 ‘검서관’을 둔 것입니다.
정조는 이런 식으로 양반 관료들을 구슬렸을 것 같습니다.
“신경 쓸 거 없어. 검서관 별거 아냐. 당신들은 정규직, 검서관은 그냥 계약직이야. 내가 규장각에 두고 허드렛일이나 시키려고 뽑은 거야.”
겉보기에 초라한 검서관, 하지만 그들은 정조의 최측근으로 무시 못 할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임금과 신하 관계를 넘어 서로 피붙이 같은 정을 나눴습니다. 정조는 특히 박제가를 아꼈어요.
《북학의》의 저자이기도 한 검서관 박제가, 정말이지 신명 나게 일했습니다. 숙직을 밥 먹듯 하면서도 힘든 줄을 몰랐습니다.
“나흘에 한 번 겨우 집에 가는데 / 늦은 귀가 언제나 해가 질 무렵 / … 어린 자식 오랜만에 나를 보더니 / 오려다간 다시금 머뭇거린다. / 배로 기어 제 어미를 향해 가는데 / 문득 보니 영락없는 두꺼비로다.”
박제가가 지은 시입니다. 젖먹이 자식이 자기를 낯설어하는 섭섭함을 표현했으나, 행간에서 나랏일 하는 행복이 읽힙니다.


▲ 외규장각 의궤 고유제

외규장각 불타다
1782년(정조 6), 정조가 강화에 또 하나의 규장각을 세웁니다. 바로 외규장각(外奎章閣)이에요. 외규장각은 왕실 서고입니다. 창덕궁 규장각에 있던 책들 일부를 강화 외규장각으로 옮겼습니다.
정조가 반란이나 전쟁 또는 기타 사고로 규장각 책이 불탈 수도 있겠다고 걱정한 것 같아요. 그래서 궁궐보다 안전하다고 믿은 강화도로 중요 도서를 보낸 것 같습니다. 이전부터 강화에서 보관하던 서적들과 합쳤는데, 모두 5천여 권이었다고 합니다.
지나고 나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만, 어쩔 수 없이 후회를 거듭 쌓아가는 게 인생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세상일이라는 게 마음먹은 대로, 기대한 대로 되는 것도 아니지요.
정조는 한양보다 강화가 더 안전하다고 여기고 외규장각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한양 규장각 서적은 안전하게 남았고, 강화 외규장각 책들은 불타고 말았습니다. 재가 돼버린 외규장각의 소중한 책들, 규장각에 그냥 있었다면, 무사했을 겁니다.
병인양요(1866)가 문제였습니다. 그때 프랑스군이 외규장각에 불을 질러 안에 있던 책까지 타버렸습니다. 1782년에 설치했으니, 외규장각의 역사는 85년간이었습니다.
외규장각 도서가 모두 소실된 것은 아닙니다. 강화부 점령 초에 프랑스군이 외규장각에서 아주 귀해 보이는 책 3백여 권을 빼내 자기들 배로 옮겨둔 상태였습니다. 그걸 그대로 가지고 갔습니다. 그들이 탈취해 간 책이 의궤(儀軌)입니다.


▲ 어람용 의궤와 분상용 의궤

의궤 이야기
의궤(儀軌)란 나라와 왕실의 주요 행사나 건축 조영 등이 있을 때, 그 일의 시작부터 끝까지 절차와 방법 등을 기록한 책입니다. 필요한 경우 자세한 그림도 삽입했습니다. 일반 책보다 두 세배 커서 금방 눈에 띕니다.
여러분이 자제 혼인 과정을 꼼꼼하게 기록해 두었다고 가정합시다. 상견례 장소, 예물, 결혼식장, 식순, 주례와 사회는 누구, 축가는 누가 뭘 불렀고, 축의금 총액은 얼마이고 식대 등 지출 내역은 또 어떠한지. 여기에 사진까지 첨부해서. 그렇다면, 집안의 ‘의궤’를 제작하신 셈입니다.
조선시대, 특성 행사의 의궤를 딱 한 권만 만드는 게 아닙니다. 같은 내용을 분상용(分上用) 의궤 여러 권과 어람용(御覽用) 의궤 한 권씩 제작합니다.
분상용 의궤는 해당 관청과 전국 사고에 보관합니다. 어람용 의궤는 임금에게 올리는 것이라 특별제작합니다. 표지나 종이가 분상용보다 훨씬 고급스럽습니다. 글씨도 또박또박 정성스럽고 그림도 더 또렷하게 그립니다.
강화 외규장각에 보관했던 의궤는 어람용 의궤입니다. 프랑스군이 가져간 의궤가 바로 어람용 의궤라는 얘기입니다. 한자를 모르는 프랑스군이라고 해도 단박에 귀한 책임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1975년에 박병선(1928~2011) 선생이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의궤를 찾아냈습니다. 모두 297권이었습니다. 박병선은 한국 정부에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1991년에 우리 정부가 프랑스 정부에 외규장각 도서 반환을 공식 요청했습니다. 1992년부터 한국과 프랑스의 공식 협상이 시작됐습니다. 길고 긴 협상 끝에 드디어 프랑스가 의궤 전부를 되돌려 주었습니다. 그때가 2011년이에요.
의궤가 돌아온 2011년 그해, 6월 11일, 강화에서 성대한 행사가 열렸습니다. 강화산성 남문에서 외규장각까지 의궤를 옮기는 가장행렬이 있었습니다. 이어서 외규장각에서 고유제를 올렸습니다.
의궤가 국내로 돌아오긴 했는데, 완전한 반환은 아닙니다. ‘영구 대여’ 형식입니다. 소유권은 여전히 프랑스에 있습니다. 그들이 약탈해 간 것을 돌려받은 건데, 겨우 대여라니…. ‘영구 대여’라는 게 이상하고 또 섭섭했습니다.
하지만, ‘장기 대여’ 형식으로 2007년에 왔던 수자기(帥字旗)가 얼마 전에 미국으로 되돌아가는 걸 보니,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영구 대여는 반납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니까요.
고려궁지 안에 외규장각이 복원된 것은 의궤 반환 운동이 진행 중이던 2003년입니다. 발굴을 통해 위치를 확인하고, 병인양요 직전에 제작된 강화부궁전도(江華府宮殿圖,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의 외규장각 그림을 참고하여 복원한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강화에는 의궤를 보관했던 곳이 둘이나 되네요. 어람용 의궤는 외규장각에, 분상용 의궤는? 그렇지요. 정족산사고에 모셨습니다. 사고에 실록만 있던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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