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박신, 갑곶나루, 염하

                                                                      ▲ 이경수
                                                                    - 강화읍 출생, 거주
                                                                    - 전)양곡고등학교 역사 교사


강화해협, 염하

강화읍 월곳리 연미정쯤에서 길상면 초지리 황산도 어름까지, 김포와 마주한 좁은 바다를 강화해협이라고 합니다. 염하라고도 하고요. 김포로 보면 월곶면 보구곶리에서 대곶면 약암리까지입니다.
길이가 17㎞ 정도, 폭은 넓은 곳이라야 1㎞ 남짓, 좁은 곳은 300m 정도입니다. 한강보다도 좁습니다. 그래서 강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육지 사이 좁고 긴 바다를 해협(海峽)이라고 하기에 강화해협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일상어로는 강화해협보다 염하라는 호칭을 더 많이 쓰는 것 같습니다.


▲ 염하

사랑에 빠진 남자
강원도 강릉에 경포호가 있습니다. 거기 있는 경포대라는 누각이 유명하죠. 경포대 근처 길가에 아기자기한 동상이 여럿 서 있어요. 박신(朴信, 1362~1444)의 사랑 이야기를 몇 장면으로 나누어 보여주는 형식입니다. 순서대로 동상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야기 얼개를 짐작하게 됩니다.
조선 초에 박신이 강원도 안렴사(도지사 격)가 되어 강릉으로 갑니다. 거기서 만난 기생 홍장을 깊이 사랑하게 됐네요. 너무 좋아 맨날 싱글벙글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강릉부사가 박신에게 홍장이 죽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전합니다. 세상이 무너진 박신은 절망에 빠져버렸습니다. 강릉부사가 박신을 위로하려고 경포호에 술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술은 그리움을 달래주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더할 뿐이네요.
쓴 술 털어 넣던 박신의 젖은 눈에 저 멀리 배 한 척이 들어왔습니다. 박신 있는 쪽으로 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 어, 그 안에 예쁘게 단장한 홍장이 타고 있는 겁니다. ‘아, 이제 헛것이 다 보이는구나.’
헛것이 아니었어요. 꿈도 아니었습니다. 진짜 홍장이 살아있는 겁니다. 죽은 여인이 어찌? 죽은 게 아니었어요. 짓궂은 강릉부사가 박신을 놀려주려고 기획한 장난질이었습니다. ‘몰래카메라’에 완벽하게 당한 박신, 낄낄거리는 부사가 얄미웠겠지만, 홍장이 살아있음에 그저 행복했답니다.
경포호에 선 박신과 홍장의 동상은 지역 명물이 되었습니다. 찾는 이들이 꽤 많습니다. 제가 갔던 날엔 서양인들도 여럿 와서 열심히 사진을 찍고 있더군요. 옛이야기를 번듯한 관광상품으로 만들어 성공한 사례입니다.


▲ 염하의 낚시꾼

갑곶나루 선착장 석축로?
이야기 주인공 박신에 관한 또 다른 기록이 《세종실록》에 실렸습니다. 한번 볼까요.

통진현의 서쪽에 갑곶이라는 나루가 있었는데, 오가는 사람들은 반드시 물속을 수십 보 걸어가야 비로소 배에 오를 수 있고, 또 배에서 내려서도 물속을 수십 보 걸어가야 언덕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므로 얼음이 얼고 눈이 내릴 때면 길 다니는 나그네들이 더욱 고통을 당하였는데, 신(信)이 재산을 의연하고 고을 사람들을 이끌어 양쪽 언덕에 돌을 모아 길을 만들었더니, 길 다니는 사람들이 지금까지 그 공로를 힘입고 있다고 한다.


김포에 살았던 박신의 선행을 기록한 것입니다. 건설 비용만 내도 칭송받을 일인데 주민들과 함께 땀 흘리며 김포 쪽 해안과 강화 쪽 해안에 돌을 쌓아 갑곶나루 석축로를 만든 겁니다. 박신 덕분에 강화와 김포 주민들이 발 젖지 않게, 얼지도 않게, 편안하게 배에 오르고 내릴 수 있게 됐습니다. 염하를 오가게 되었습니다.
박신이 만든 그 석축로는 아니겠지만, 지금 김포시 월곶면 성동리에 ‘갑곶나루 선착장 석축로’가 있습니다.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된 문화유산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갑곶나루+선착장+석축로’라는 단어 조합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나루와 선착장이 사실상 같은 의미라고 봅니다. 하여 ‘갑곶나루 선착장 석축로’보다 ‘갑곶나루 석축로’가 더 자연스러운 명칭이라고 여깁니다.
그런데요, 강화에도 김포와 똑같은 이름인 ‘갑곶나루 선착장 석축로’가 있습니다. 강화대교 아래 진해루 쪽입니다. 인천광역시 기념물이에요. 하지만, 강화에는 석축로 형태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실체가 없는데, 있는 것처럼 인천시 문화유산으로, 여전히 지정돼 있는 것입니다. 지정 해제하는 게 적절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찌하여 강화와 김포의 나루 이름이 똑같은 걸까? 이 문제를 검토합니다. 조선시대에 강화뿐 아니라 김포의 석축로도 갑곶나루로 불렸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김포 ‘갑곶진(甲串津)’을 강화부로 건너가는 나루라고 설명했습니다.
오고 가는 나루 이름을 같이 쓰는 관습 같은 게 있었던 모양이에요. 송해면에 승천포가 있습니다. 그런데 물 건너 북한 땅 개풍에도 승천포가 있었습니다. 송해 승천포에서 개풍 승천포로 배 타고 오갔던 겁니다.
양사면 인화리에 인화석진이라는 나루가 있었습니다. 여기서 배 타고 교동도에 가는 거죠. 그런데 교동의 나루 이름도 인화석진이었답니다. 《세종실록지리지》는 교동 나루인 ‘비석진(鼻石津)’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현(縣) 남쪽에 있다. 속칭 인화석진이라 하며, 나룻배가 있는데, 강화로 왕래한다.”
아무튼, 강화 나루는 갑곶나루! 김포 나루도 갑곶나루!


▲ 박신과 홍장 조형물[강원도 강릉시 경포호]

갑옷만 쌓아도?
김포 ‘갑곶나루 선착장 석축로’에 갔더니 안내판이 서 있더군요. 읽어보니 ‘갑곶’이란 지명이 고려 대몽항쟁기에 처음 생겼다는 설명입니다. 아닙니다. ‘갑곶’은 몽골군이 쳐들어오기 전부터 쓰던 지명이에요. 고려 건국 초에도 이미 ‘갑곶’이라는 지명이 있었거든요. 그러면, 안내판 설명글을 쓴 사람이 엉터리?
그렇지 않습니다. 안내판 원고를 쓴 이가 《신증동국여지승람》을 인용한 것인데, 그 기록이 오류인 것입니다. 지금도 그렇기는 하지만, 옛 기록에도 틀린 데가 있는 법입니다. 그러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뭐라고 나왔는지 확인해봅시다.

전조(前朝)의 고왕(高王)이 여기 와서 피난하는데, 원나라 군사들이 쫓아와 말하기를, ‘갑옷만 쌓아 놓아도 건너갈 수 있다.’고 하였기 때문에 갑곶이라 이름하였다.

전조는 고려, 고왕은 고종, 원나라는 몽골을 가리킵니다. 김포 땅까지 쳐들어온 몽골군이 염하가 깊지 않은 걸 알고는 갑옷만 쌓아도 걸어서 강화로 갈 수 있다고 했고, 여기서 ‘갑곶’이라는 이름이 생겨났다는 겁니다. 사실이 아님에도 이 이야기가 꽤 알려져 있습니다.
아무래도 ‘갑곶’은 강화의 옛 이름인 ‘갑비고차’에서 유래한 지명일 겁니다. 김정호가 지은 《대동지지》에도 ‘갑곶진(甲串津)’이 곧 ‘갑비고차진(甲比古次津)’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염하’를 위한 변명
염하라는 호칭은 언제 생긴 걸까요?
병인양요(1866)에서 비롯됐습니다. 프랑스군이 물길을 탐측하고 해도(海圖)를 작성하면서 강화 어느 주민에게 바다 이름을 물었습니다. 주민이 짠 물, 짠 강, 뭐 이런 식으로 대답했던 모양이에요. 강화해협을 왜 짠 강이라고 했는지 연결이 안 됩니다. 아마도 통역 과정에서 주민의 말이 왜곡된 것 같아요. 막연합니다만, 그들의 대화를 상상해봅니다.

프랑스군 : 이 강 이름이 뭡니까?
강화주민 : 강 아니고 바달시다.
프랑스군 : 바다라고요?
강화주민 : 맛을 보시겨, 짜지. 강물이 어떻게 짜이꺄?

어쨌든, 프랑스군이 강화해협을 ‘짠강’으로 해석해서 ‘Rivière Salèe’라고 기록했습니다. ‘salèe’는 소금을 치다, 짜다, 그런 뜻이고 ‘Rivière’는 강, 하천이라는 의미입니다.
병인양요 후 일본군은 프랑스군이 제작한 강화 해도를 입수해서 번역합니다. ‘Rivière Salèe’는 소금 염(鹽) 자를 써서 염하(鹽河)로 직역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염하’라는 명칭이 세상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염하강’이라는 표현을 종종 보고 듣게 됩니다. 굳이 ‘강’을 붙일 필요가 없지요. ‘하(河)’에 이미 강의 의미가 담겼으니 말입니다. 염하강이 아니라 그냥 염하입니다.
그런데 ‘염하’라는 명칭에 거부감을 느끼는 분들도 계십니다. ‘염하’라는 명칭을 쓰지 말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 이유가 대략 이러하다고 합니다.
프랑스군이 강화해협에 ‘짠강’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조선을 깎아내리려는 의도였다! 엄연한 바다를 강으로 낮추어 부른 것도 제국주의의 거만함을 드러낸 것이다! 일제 잔재 청산 차원에서도 ‘염하’를 쓰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니 ‘강화해협’이라고 쓰고 말하자!
저는 생각이 조금 다릅니다. 이제 ‘염하를 위한 변명’을 말하렵니다.
프랑스군이 ‘Rivière Salèe’라고 작명한 것은 조선을 깔봐서가 아닙니다. 주민의 말을 번역한 것일 뿐입니다. 병인양요 때 그들이 몹쓸 짓 참 많이 했으나, ‘Rivière Salèe’에까지 죄를 묻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바다를 강으로 표현한 것은 염하가 강처럼 폭이 좁아서 비유적으로 쓴 것일 겁니다. 고려시대에도 강화해협을 강(江)으로 불렀습니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강’이라는 표현이 여러 번 등장합니다. 무슨 강이라고 했나. 갑곶강(甲串江)이라고 했습니다. 조선시대 인조는 강화해협을 장강(長江)이라고 불렀습니다. 일제강점기 신문에도 ‘갑곶강’이 등장합니다.
‘염하’가 일본인 손을 타고 나온 단어라 찝찝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일제 잔재라기보다는 문화 전파와 수용이라는 측면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 같습니다.
우리가 쓰는 한자 단어 상당수가 일본이 서양 학문을 번역한 용어입니다. 정치, 경제, 철학 이런 단어는 물론이고 매점, 체념, 출산, 낭만, 이렇게 실생활에서 쓰는 단어들도 일본제 한자어입니다. ‘갑곶나루 선착장 석축로’의 ‘선착장’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하니, ‘염하’라는 이름도 너그러이 품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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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벽하 기자 다른기사보기